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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진정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리라.
관리자
- 1391
- 2018-05-20 07:13:12
믿음이 있다면 성령이 함께 하심이며 성령이 함께 한다면 믿음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은 세속 교회가 정의하는 믿음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세속의 교회와 목사는 자신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위해 믿음을 이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교회와 목사는 개독교의 모습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령은 믿음을 온전케 하는 주님의 거룩한 영이시다.
믿음은 성령을 온전히 사모하여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소망이 된다.
그러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였다.
그 실상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실상은 감동이며 감화이자 울림이다.
그 실상은 때론 꿈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꿈을 꾸게 된다.
이 꿈이 현실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 현실 속에서 또 꿈을 꾸게 하니 이것을 빌어 환상이라고도 한다.
환상은 꿈의 또 다른 현실이자 실재이다. 이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환상을 예언이라고도 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이다.
단지 미래에 대한 점을 치는 것이 예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대언하는 것을 예언이라 함이다.
그래서 참 예언은 미래에 대한 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현실을 말함이다.
현실과 미래가 하나되어 나타나는 것을 예언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미래와 현실이 어긋난다면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예견이다.
예견은 세상의 지식인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예견이 예언 못지 않게 현실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점쟁이들의 예언도 보라.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은 이러한 점쟁이들의 예언과 세상 지식인들의 예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말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이러한 것들을 어리석다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옳다 하지 않으실 영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미신이 아니다.
성령을 모르니 어떤 이들은 성령을 미신과 같이 취급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이들의 말을 들어보라. 그리고 그들이 행한 일들을 보라.
그들은 예언을 하며 그들은 미래의 일이 현실이 되며 현실을 통해 미래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은 기적과 같지만 실상은 기적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날 마땅히 일어날 또 다른 현실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한다.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회심은 이러한 심령의 변화인 것이다.
그러기에 회심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온전한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회개케 하시는 거룩한 영이자 보혜사인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는 능력과 권세가 된다.
지혜는 세상의 지식이 아니다. 물론 지혜 가운덴 세상의 지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세상의 지식과 일치 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지식을 포함하지만 세상의 지식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지식을 바꾸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기에 지혜는 세상의 또 다른 지식이 되기도 하며 상식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오직 믿음 외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
오직 진실한 믿음의 사람 외에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 붙은 떨기나무를 통하여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말을 한다. 어찌 떨기나무가 스스로 탈 수 있는가? 어찌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다 타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 하여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지어진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 할 것이다.
그래 그러한 주장을 십분 받아 들여 떨기나무에 불이 붙지 않았다 하자.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던 것이 아니라 하자.
그러나 만약 이것이 모세가 본 환상이라면 어찌 할 것인가?
환상이 신화인가? 믿음이 없다면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성령의 역사라 할 것이다.
환상이 지어낸 이야기인가? 믿음이 없다면 그도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는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 역사라 말을 할 것이다.
또 혹자는 말을 할 것이다.
출애굽의 사건 그 자체가 이미 신화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 그 말도 십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그렇다면 그러한 출애굽의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소설가들이나 작가들이 만들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들이 그러한 글을 쓰면 뭐라 하던가? 그들도 영감을 통해 글을 쓴다고 하지 않던가?
때론 신앙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들도 영감으로 소설이나 글을 쓴다고 말을 하는데.... 하물며 성경의 말씀을 인간 스스로 자작했다고 생각을 하는가?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이다.
성령을 통한 회심을 경험한 이라면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오히려 믿음이 없는 이들을 꾸짖을 것이다. 또한 회심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삶의 변화와 그들이 이룬 믿음의 업적들을 보라. 과연 모세의 이야기가 단순하고 허황된 신화라 일축할 수 있는지 말이다.
성령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혜가 된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식이 아니며 세상의 지식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이 된다.
그 무엇은 이것이다.
꿈이자 환상이 실상(체)이 되는 믿음의 역사이자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응답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믿을 때 역사하는 그 역사가 놀랍게 나타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니 그 역사하는 역사는 이미 놀라움의 체험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체험이며 마음의 뜨거워짐이자 믿음이 온전케 되는 거듭남이며 자신도 놀라워 할 삶의 변화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허황된 꿈과 환상으로만 여겨졌던 일들이 실재가 되는 놀라운 변화인 것이다.
이 변화가 바로 출애굽이다.
이 거듭남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출애굽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 허황되 보이는 꿈과 환상을 들고 바로를 찾아왔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황된 꿈과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모세를 보았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도 꿈을 꾸었고 환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를 애굽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다. 꿈도 아니며 환상도 아니다.
그들의 내일이 되었으며 그들의 미래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현실과 연결된 실체화 된 미래 말이다.
성령의 사람은 꿈을 꾼다. 예언을 한다. 그리고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
허황된 세속의 신화가 아닌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증언되어졌던 하나님의 응답이자 성령의 역사를 말이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믿을 때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응답은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다.
성령은 믿지 못할 현실을 살아가며 바랄 수 없는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 우리로 믿음을 갖게 할 것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것이고 성령은 우리로 믿음을 온전케 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들을 온전히 믿을 때 말이다.
온전한 믿음을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령의 감동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나님께 울부짖으라.
보름달을 향해 울부짖는 외로운 늑대와 같이 말이다.
우리가 진정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성령은 진정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리라.
이제 이 글을 마치며 이집트 왕자의 OST였던 "when you believe"를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