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은 이리 저리 피신해야산다./간신 유자광

도현종
  • 1404
  • 2018-06-06 00:29:51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분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이후로는 세조에게 공을 인정받고는 큰 총애를 받아 그 벼슬이 정 5품인 병조정랑에까지 이르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단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1)간신의 출세 방법이다.9월초 약속을 지킬것인가?

세조는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 별시 문과를 치르게 하였고 유자광을 장원 급제로 삼았다. 그 해 유자광은 정3품 병조 참지에 올랐는데, 서얼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갑사 신분이었던 때로부터 채 1년도 걸리지 않은 벼락 출세를 했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 된것이다.

2)갑작스러운 직무 대행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세조가 이토록 유자광을 밀어 주었던 것은 재위 기간 이시애의 난을 치르는 동안에 한명회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한명회를 잠시나마 옥에 가뒀던 사실을 보면 비록 세조가 공신들을 아끼기는 했으나 그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경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회장의 권력을 빗대어 반대하는 청렴한 목사님들을 탄압하시려는가?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에 존재했던 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 이후로 생겨난 신진 무신 세력의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진 무신 세력의 대표 주자였던 남이는 세조 시절부터 자신들을 견제해오던 공신 세력들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세력을 규합하여 공신 세력과 권력을 두고 한바탕 권력 다툼을 벌일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남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하고 그와 접촉하여 여러 불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4)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조직이 필요하신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성종 7년에는 파직되는 굴욕을 겪었다. 1478년에는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서 조정을 더렵혔다 하여 공신적을 박탈당했다가 1481년에 다시 되찾았다. 4년이 지나서야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종1품 숭정대부 겸 도총관이 되었다가 임사홍과 함께 공신에서 물러나 삭탈되는 등 다사다난한 시기가 성종 때였다. 실제로도 가뜩이나 서자 출신인데 세조의 총애 덕에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대신들에게도 사림 출신 대간들에게도 미움을 받아 사간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4)회장직에는 권모 술수만이 살길인가?.

연산군이 즉위하고 연산군은 조의제문의 반체제적인 내용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을 썼던 김종직은 이미 죽은 몸이었기에 부관참시당하였고, 그것을 실은 김일손이 처형당했으며 그의 제자들이었던 수많은 사림들도 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유자광은 앞장서서 사림파들을 때려 잡았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또다시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사림들을 탄압함으로서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
그 진정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연산군과 유자광이다. 연산군 역시 조의제문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철저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주님 감리교회 공동체를 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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