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신하 잘난 신하

도현종
  • 1479
  • 2018-06-16 07:28:55
중국 역사에 풍도(馮道)라는 사람이 있다. 당(唐)이 망하고 송(宋)이 서기까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난세 속에서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명의 임금을 섬겼다. 고위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0년을 지냈다. 걸어다니는 벼슬 교과서였다. 문장.역사에 뛰어나고 주색을 멀리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신하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내팽개쳤다. 군주에게 직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만 외쳤다. 그러니 그가 의지한 나라들이 전부 망할 수밖에없었다. 나라와 백성이 존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풍도는 백관을 이끌고 성을 나와 새 주인을 맞았다. 거란이 진(晉)을 멸했을 때도 거란 태종 야율덕광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덕에 태부(太傅) 벼슬을 또 얻는다.

오늘날 비슷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매사매사 좋은 게 좋은 거고 오로지 관심은 윗사람 비위 맞추는 데 있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 대패했다.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간다) 정체를
알수없는 망언으로 시작한 안어의 불통들이 사방에서 실패란 치욕을 몰고왔다.

풍도는 말년에 자신을 일컬어 이리와 호랑이떼 틈바구니에서 입신양명했다고 떠벌렸다. 자신의 명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당나라 초기의 공신 위징(魏徵) 말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보수적 충신론에 따르면 위징은 충신이 되지 못한다. 그는 수(隋) 말기 반란군 지도자 이밀의 책사였다가 당 고조에게 귀순해 황태자 건성의 참모가 됐으며, 건성이 아우 세민(태종)과의 경쟁에서 패한 뒤 태종 밑에서 재상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군주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태종은 위징의 바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가도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충고를 따랐다.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가능했던 이유다. 위징이 말하는 충신과 간신과의 구별이 그것이다. 간신은 결국 백성의 미움을 사 주살당하기 쉽고 군주에게 어리석음을 (가져다줘 오명을 남기게 하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할 수 있다.
충신이 되는 데는 한 가지 원칙이면 족하다. 위로는 군주를 지혜롭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행복하게 한다는 믿음 말이다. 이러려면 훌륭한 군주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군주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충언으로 이끌어야 한다. 군주의 마음이 상해도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라면죽음을 각오하고 군주의 태도를 고쳐야한다.

위징이 태종에게 한 지적을 들어보자. 초기에 폐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내놓도록 유도했습니다. 3년 뒤에도 충고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마지못해 의견을 듣지만 마음이 편치 않으십니다.
태종은 후에 고구려를 침략했다 양만춘의 화살에 한쪽 눈만 잃고 돌아가는 길에 위징이 살아 있었으면 고구려 정벌을 말렸을 것이라며 땅을 쳤다고 한다. 백성들의 삶이 더 고단해지기 전에 위징이 나올 수는 없는 건지 묻는다.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위징이 그립다.

감리회 목숨걸고 성령 운동하는자가 회장에 나와야산다.성서를 부여잡고 외치는 광야의 요한이 나서야한다. 정치판은 결국 세상적인것이다. 하나님판을 의지하고 걸어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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