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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오재영
- 1583
- 2018-06-16 07:19:20
증언하는 날, 디누어가 재판정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방탄유리가 설치된 작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친구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직접 죽였으며,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바로 그 남자..... 희생자와 살인마, 두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법정 안은 일순간 침묵이 흐르며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발생한 일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예힐 디누어가 비명을 지르며 마루에 쓰러진 채 흐느끼며 울었던 것이다. 그는 증오를 억누를 수가 없었는가, 소름끼치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는가, 그도 아니면 아이히만의 얼굴에 나타난 악마의 모습에 압도당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 CBS ‘육십분’ (60Minutes)이라는 TV 프로에 출연한 디누어는 그 상황에 대하여 회상하기를, 그날 그가 만난 아이히만은 그가 항상 상상해 왔던 사악한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다고 했다. 아이히만은 그저 늙고 초라해진 보통사람이었다. 다른 늙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바로 그 순간 디누어가 알게 된 것은 죄와 악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서글픈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디누어가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와 똑같이 그런 잔인한 짓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디누어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회자 마이크 월러스는 TV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고 시청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아이히만과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는 괴물이었습니까? 정신 이상자였습니까? 아니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존재였습니까?...... 그는 정상인이었습니까?” 디누어의 결론은 무엇인가? 지금도“아이히만은 우리 모든 인간들 속에 잠재해 있습니다.”
나도 동일한 경험을 하였다. 1981년, 일리노이 주 메너드시에 위치한, 국내에서 경비가 가장 삼엄한 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사형수 한명이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중년에 접어든 그는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하고 있었고, 따뜻한 미소와 지적인 눈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수갑과 쇠사슬만 없었다면 그는 친절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나 친근한 동네 약국의 약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33명의 젊은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한 후 살해했던 존 웨인 게이시 2세였다. 우리 두 사람이 작은 면담 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게이시는 매우 이성적이었다. 그가 저지른 엄청난 살인 행각만을 보면 그는 병자 중에도 중증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병자였다. 죄라는 병이 끔찍한 악행으로 분출된 것이다. 나는 그가 우리 모든 인간의 내부에 거하는 죄와 똑같은 죄의 병을 앓고 있음을 상기한 후에야 한 시간 동안 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을 수 있었고, 그와 함께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동시대에 공존하는 인간된 우리들에게 비극적인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도 도덕적인 중립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지금도 모두의 내면에 있다. 그리고 그 병은 오직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 외에는 씻길 수가 없다.
오늘도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려 있다. 그것은 교회 성장이 목회자로서 성공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면 대부분의 경우 목사라는 직임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시장, 즉 진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도록 날마다 조종당하고 있으며 쾌락을 삶의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삼는 수백만의 도나휴족들에게 준비도 없이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주.-찰스콜슨, 이것이교회다.p231-233.인용.)
얼마 전, 이웃교회에서 연회 안에 계신 원로목사님들을 접대하는 행사가 있었다. 연회 안에 193분이 계시고 전국적으로는 1,900여분, 금년에 은퇴한분들도 127명이라 했다. 그날 뵙고 인사드린 분들 중에는 초년 목회 시절, 멀리서 바라만 보고 계셔도 마음이 떨리든 분도 계셨다. 그중에는 너무나 유난스럽고 괴팍스럽게 행동하셔서 될 수 있으면 그분 눈에 띄지 않으려 피하여 다닌 분도 계셨는데,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이제는 극 노인이 되셔서 굽은 허리로 비척거리며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
어느 목사께서 후배에게 보내는 글을 읽으며 내 모습 같아 마음쓰린 적이 있다.
“남들이 다 가는 사역의 길로 가지마라. 그것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제공해 줄지는 몰라도 너의 영혼에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한다. 모두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 않는 길로 너의 삶과 인생을 던져라, 우선 그 현장에 들어가서 너 자신의 무능함을 절절하게 깨닫는 시간을 가져라, 네가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준비한 사역과 공부가 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생생하게 경험해 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때 “이런 시간 이후에는 주께서 나를 높여 주시겠지?”하는 잔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력을 쌓기 위한 고생은 너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런 현장에서 보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그대로 포착된다. “저 양반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간이구나!” 영혼이 담기지 않은 사역은 단 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안기게 된다. 그러한 길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인생은 인생대로 망가지는 첩경이 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니? 자기가 고생한 근거를 들이밀면서 “내가 그거 좀 해봐서 아는데”로 모든 대화를 시작하는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고생한 이력이 ‘자기 의’가 되어버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살아가는 불쌍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김관성, 살아봐야 알게 되는 것).
그런 말이 있다. “정죄는 부분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고, 사랑은 전체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아침 생명의 삶 큐티지에 있는 ‘레오나드 레이븐힐’ 의 말이 마음을 숙연케 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너나없이 들은 소문과는 다르게 직접대하면 그동안 들어온 소문과는 달리 주님 면대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부실한 부분들이 오늘도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이어가는 적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