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인물사전
잊혀진 사람을 되살리며 – 한국 감리교회의 공식적인 시작은 1884년이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백 18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한국 감리교회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감리교인으로 선택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이 부름에 응답한 한국 감리교인들은 하나님의 큰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그들은 자신과 이웃,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한국 감리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최근 들어 역사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감리교인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 감리교회를 만든 사람은 잊혀져 있다. 그 동안 몇몇 개인에 관한 전기나 회고록이 발행되기는 했으나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정이 그랬기에 감리교의 역사 인물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인물사전의 편찬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에 역사위원회에서는 감리교의 역사 인물을 기억하고 기릴 뿐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의 위상을 한국 교회와 사회에 알리기 위해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을 발행하게 되었다. — 발간사에서
2002년 10월
김명현 김흥수 서영석 이덕주 이시영 조영렬 조이제 한규무
선교사사전
한국감리교회가 오늘의 성장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외국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교사들의 숫자와 생애와 사업에 관하여 별로 많이 알지 못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신앙은 우리 신앙의 뿌리요 선교사들의 복음활동은 우리 전도활동의 뿌리이며 선교사들의 기독교 문화활동은 오늘 우리들의 기독교 문화활동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사들을 아는데 너무나 등한시 해왔다.
우리 한국감리교사학회에서는 한국감리교회의 뿌리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630여명을 조사하여 그의 출생과 교육, 그리고 한국에 와서 이룩한 사업 등을 기록하여 [한국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선교사 인명록을 출판한다. 학자, 기독교 지도자, 목사, 신학생들에게는 절대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본서의 출판비를 협조해 준 선교부 마태진 목사와 원고정리와 교정에 수고한 기정양에게 감사드린다. 본서를 사용하는 인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기원한다. — 발간사에서
1989년 3월 18일
한국감리교회사학회 회장 윤춘병
[선교사사전]브럼보(Brumbaugh, Twoburn Taylor,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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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05 01:01:00
미연합감리교회 해외선교부 동아시아 총무. 1896년 8월 4일 오하이오주 어거스터에서 출생한 후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문학사, 보스턴대학교 신학사, 뉴욕 유니온신학교 신학석사, 1838년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1957년에는 서울 연세대학에서 법학박사와 1959년에는 도쿄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24년 8월 28일 결혼하였고 1924년 미감리교 오하이오 서부연회에 입회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일본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도쿄, 히로시마, 삿포로 등지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다 1942년 전쟁으로 귀국하여 디트로이트 교회협의회 집행부 임원으로 일한 후 1947년 미감리교회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총무로 파송되어 17년간 일하며 한국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
브럼보 총무가 한국에 온 것은 1949년 10월 22일 여선교부 빌링슬리 총무와 함게 해방된 한국교회 시찰차 내한한 것이 처음이었다. 한국교회에서는 1949년 10월 25일 브럼보, 빌링슬리 두 총무를 맞이하여 총리원 이사가 각 지방 감리사 연석회의를 열고 38선 문제, 남조선의 전도문제, 왜인에게 수난당한 교회 복구 문제, 신학교 운영 문제, 농촌 갱생 문제(복음농민하교 설립문제), 교계언론 출판문제, 의료사업 발전 문제 등 한국 감리교회 재건 문제를 토의한 후 귀국했으나 다음 해 6.25전쟁이 발발하여 한국 교회 원조 문제는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브럼보 총무가 두번째로 내한한 것은 전쟁이 반이 지난 1952년 6월 3일이었다. 당시 약 1개월 가량 묵으며 대구, 대전, 서울, 강릉, 원주, 수원, 천안, 공주 등 감리교회 전지역을 시찰하여 교회와 기관사업의 피해상황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한국 교회 복구와 재건 문제르 ㄹ다각도로 연구한 후 1954년 5월 10일 다시 내한하여 한국 감리교회 재건사업 연구위원회가 모이도록 준비했다.
브럼보 총무는 그 해 6월 11일에 뒤따라 내한하는 MCOR 위원장 뉴올 감독 부부와 미선교부 총무 유진 스미스 박사 부부, 미감리교 재정책임자 아담스 박사 부처, 여선교부 위원장 와그너 부인, 여선교부 극동총무 빌링슬리 등 미국에서 오는 일행을 맞이하여 그들을 부산과 마산을 거쳐 서울지구를 중심으로 시찰하는 일에 안내한 후 23일부터 약 1주간 대천에서 한국측 25명과 선교사측 18명의 대표들이 모여 한국교회 재건연구위원회로 모이도록 주선한 후, 미국 교회에서 한국 교회 복구와 재건을 위해 100만달러 모금하기로 결의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해 가을 미국 교회 모금액은 100만 달러에서 60만 달러가 초과되어 160만 달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그 금애긍로 교회부터 1천여 처로 확장시키는 한편 대전신학교(현 목원대학)와 원주 기독병원을 신설했고 인천기독병원을 확충했으며 감신의 웰치기념 채플을 건축했다. 인우학사와 명덕학사도 그때 마련한 사업이었고 부산사회관과 대전사회관도 새로 세웠을 뿐 아니라 이화대학교,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에까지 5만달러씩을 복구비로 후원해 주기도 했다.
6.25전쟁 후 감리교회는 오늘의 대교회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조성해 놓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활동에는 브럼보 총무 힘이 컸다는 것을 한국 교회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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