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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물어오신 두번째 질문
원형수
- 134
- 2025-09-19 22:29:02
창세기 4장 1-15절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질문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가인에게 물어오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담긴 인간관계의 깊은 의미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1. 에덴의 동쪽에서: 관계가 깨어진 자리
성경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위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질서가 바로 하나님의 조화입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오면서 이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고, 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제한을 두셨습니다.
이같은 제한은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이지만,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임을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이 가장 온전해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 후 하나님을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이 단절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 관계를 묻는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셨습니다.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아담이 자신이 벗었음을 고백한 반면, 가인은 천연덕스럽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라고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대답이 가능할까요?
아벨은 그의 유일한 동생이자, 한 몸에서 나온 혈육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듯, 가인과 아벨도 마땅히 그런 관계였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아벨과의 관계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나는 아우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관계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우리를 홀로 고립시킵니다.
가인은 결국 하나님과도, 동생과도, 심지어 삶의 터전인 땅과도 단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은 것은 끝없는 방황과 불안뿐이었습니다.
창세기 4:16절의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란 말씀은 단순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외롭고 방황하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나 누가복음 10장 ‘강도만난 나그네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문제삼으셨든 것 역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무관심했던 왼편 사람들(마25:41-46), 그리고 강도만난 나그네에게 무관심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무관심의 죄에 대해 묻고 게십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무시했던 이웃, 친구, 가족에 대해, 하나님은 "네 아우 아벨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계속해서 묻고 계십니다.
3. 관계 회복: 더불어 사는 존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롬8:18-22).
많은 사람이 '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홀로 두지 않고 돕는 배필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는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관계가 회복되어야 삶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굳게 닫혔던 이웃과의 마음의 문도 열립니다.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부엉이처럼,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가 환경 때문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 동네가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피하면) 될 것이라" 여기지만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관계를 깨뜨린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부엉이가 "네 목소리를 고치지 않으면 다른 마을로 가도 마찬가지야!"라고 한 비둘기의 말을 들었듯,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의지를 고쳐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관계 회복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곳, 실수와 허물이 용납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모릅니다"라고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로 제 곁에 있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아우 아벨은 누구입니까?
가족, 친구, 동료, 혹은 소외된 이웃입니까?
그들과의 관계는 진정 안녕한가요?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 질문이 바로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소그룹(속회) 나눔자료>
(1) 소그룹 나눔을 위한 질문
1) 요즘 내가 외면하고 있는 나의 ‘아벨’은 누구일까?
2)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3) 하나님이 나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을까?
4) 내가 누군가를 돕는 배필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독처하고 있는가?
5)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나는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경험이 있는가?
(2) 적용을 위한 질문
1) 이번 주 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 안부를 묻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눠보기
2)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당신은 내게 소중한 존재입니다”라는 말을 직접 전해보기
3) 교회나 직장에서 소외된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식사하거나 시간을 보내 보기.
4) 하루에 한 번, 하나님께 “오늘 내가 누구를 돌아보아야 할까요?”라고 기도해 보기.
5) 내가 무관심했던 관계나 상황을 적어보고, 그 중 하나를 회복하기 위한 작은 행동 실천해보기
(3) 한 주간 묵상할 주제
1) '관계'의 의미: 나에게 ‘관계’란 무엇인가?
2) '돌봄'의 책임: 나는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인가?
3) '무관심'의 죄: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4) '함께'의 기쁨: 홀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5) '관계 회복'의 시작: 용서와 화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첫걸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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