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대중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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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6 20:01:01
1. 시작하는 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잘난 나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배려할 줄도 모릅니다. 또한, 남들을 잘난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과 이기적 욕심으로 살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부모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을 인정할 줄도 알고, 배려할 줄도 압니다. 또한, 남들을 보은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사와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며 생활하는 것은 믿음의 선진들의 사랑과 희생의 결과입니다. 대표적인 선진은 바울 사도입니다.

2.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한 바울 사도

철저한 핍박자이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바울 사도는, 성령을 좇아 능통한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 등등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구주임을 밝히는 문서를 남겼습니다. 그 문서들 중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열세 서신입니다. 바울의 열세 서신 중에서 로마서는 세상의 그 어떤 책들이나, 그 어떤 성경책들보다도 심오하고 웅대하고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방 세계에 구원의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선교 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환난과 핍박, 영적 지각도 영적 체험도 없는 지성인들의 논박과 비아냥거림, 집단 구타와 모함에 의한 채찍질, 그리고 살해 위험이 줄기차게 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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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의 종노릇을 위한 열정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인간 사랑의 열정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 바울 사도는 그때그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환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곤 했습니다.
그 바울 사도의 환난과 핍박은 3차 선교 여행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에서도 또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들은 대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바울 사도가 해를 당할까 염려한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바울이, 서원한 네 교인과 함께 결례를 행했을 때였습니다. 결례 기간인 이레가 거의 차매 에베소가 수도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 사도를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 유대교인인 유대인들 중에는,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전심전력을 다해 선교하던 바울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고, 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최고 최대의 선물인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조롱하고 박해하는 이들이 있고, 모함하여 감옥에 넣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죽여 없애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선교사들이 박해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고, 살해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려고 시도한 극단적인 이슬람교도들로 인해 중화상을 입은 교인들도 있었고, 순교하여 천국에 간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생명의 삶(2015. 9월 호)에 실린 진재혁 씨의 글입니다.
스위스에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장작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선 그는 화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감독관에게 말했습니다. “손을 제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으로 죽을 몸입니다. 제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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뛴다면 주님을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제가 믿는 주님을 당신도 믿으십시오.” 감독관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순교를 앞둔 그의 가슴은 침대에 누워 자는 사람처럼 고요했습니다. 감독관이 놀라워하며 외쳤습니다. “이 비범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복음과 영혼 사랑을 위해 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을 보면, 바울 사도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에베소가 수도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외쳤습니다. 바울은 각처에서 유대 백성과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을 헐뜯어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인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일 수도 있는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모독이고, 성전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의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고, 거기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고 헬라어와 라틴어로 쓰인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외침은 악의적 왜곡이요 모함이었습니다. 실상, 바울 사도는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인 참 이스라엘과 완전한 율법인 복음과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이 외친 모함과 고발 내용은 매우 중대한 범법이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예루살렘 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모른 척하는 것은 불충으로 간주되므로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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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성전 책임자는 바울의 피로 성전이 더럽혀질까 봐 성전 문을 닫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유대 군중은 그를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대중의 문제란 전문성도 없고,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집단 이기와 집단 감정에 의한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바울을 쳐죽이려는 군중의 집단 살의 때문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당시에 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지휘관인 천부장은, 예루살렘의 로마 수비대 사령관인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이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이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자 유대 군중은 바울을 치는 짓을 그쳤습니다. 동족의 영생 구원을 위해 복음의 사랑을 실천한 바울은, 그 동족에 의해 맞아 죽을 뻔했으나 이방인 군대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체포하여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고 명령한 뒤에, 군중을 향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문성도 없고, 사실 확인도 없는 군중이 부르짖는 대답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실상을 알 수 없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언의 계시대로 바울 사도는 이방인에게 넘겨졌습니다. 사도의 불행은 잠시 후에 이방 군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복된 기회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닥친 문제를 문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하는 불행을 불행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문제와 불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게 활용하실까 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영혼 사랑을 위해 핍박을 받아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죽어 봐야 천국밖에 더 가겠나 하는 신앙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안토니의 병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도착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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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무리가 따라오면서 바울을 없애 버리자고 외치는 포행 때문에 군사들에게 들려서 올라갔습니다.
유대교인인 유대 군중이 바울을 없애자고 외친 것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유대교인인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없애라고 외친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에게 주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잔악하게 외친 것도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었고, 주님의 사도인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잔악하게 외친 것도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해서 다 선민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칼 싸움을 한 두 목사도 있지 않습니까?

3. 맺음말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생 구원을 위해 얼마나 사랑을 해 왔습니까, 얼마나 희생과 박해와 조롱을 당해 보았습니까, 받은 은혜와 복을 얼마나 사랑과 복음 선교의 방편으로 사용해 왔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고, 믿음의 선진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채무 의식을 가지고, 보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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