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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II (고린도전서 15:5-12a)
관리자
- 2520
- 2017-04-11 20:21:03
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있어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또한 모든 선교의 초점이 되었다.
이어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특이한 점은 막달라 마리아(막 16:9-11, 요 20:11-18)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막 16:12-13, 눅 24:13-35) 그리고 도마(요 20:26-29)에게 현현하신 사건들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무튼,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해,【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라고 하였다.
전자와 같은 기록은 누가복음 24:34에도 있고, 후자와 같은 기록은 누가복음 24:33-39과 요한복음 20:19-23, 26에도 있다.
[게바]는 1:12의 주석을 보라.
이어서 바울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라고 하였다.
복음서에는 없는 기사이다.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라고 하셨고, 또 부활하신 새벽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 왔던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라고 하셨으며, 그 말씀대로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 경배했다고 하였으므로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부활하신 주님을 일시에 목격한 오백 여 형제 중에 태반이나 본서를 쓸 당시에 살아 있었으므로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구약성경(창 47:30, 삼하 7:12, 신 31:16, 왕상 2:10, 단 12:2)이나 신약성경(11:30, 마 9:24, 27:52, 요 11:11, 행 7:60, 13:36, 벧후 3:4)에도 나타난다. 그러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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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표현은 한국이나 이교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 완곡어법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계속해서 바울은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라고 하였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로 짐작하고 있다.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에는 믿지 않았으나(막 3:21, 32, 요 7:5), 오순절 때에는 제자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고(행 1:14), 그 뒤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행 15:13, 21:18, 갈 2:9). 그리고 [모든 사도]는 5절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신 것을 언급했으므로, 그 밖의 넓은 의미의 사도들(1:1의 주석을 보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하였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는 토 에크트로마티(τῷ ἐκτρώματι)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사용되었다. 이 말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설①과 육적으로 이해하는 설②이 있다. 전자를 취하면 예수께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 동안에 줄곧 함께했던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볼 때, 바울은 적당한 임신 기간을 거치지 않고 태어난 자와 같다는 것이다. 후자를 취하면 비유로 보아 부족하거나 못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법은 헬라 사회에서 사용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현현하신 사실-바울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현현하신 사실과 동일시한다-을 가리키는 것(1:1의 “사도”의 주석을 보라.)이므로 후자를 위해야 한다. 즉, 그는 사도 중에 부족하고 못난 사도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도가 되기 이전에 극렬한 핍박자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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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Calvin, M. Henry, “Beet, Godet, Vincent”(in 이상근), J. Wesley, A. Clarke, D. S. Metz, A. Robertson and A. Plummer, C. R. Erdman, L. Morris, T. C. Craig, C. Hodge, 黑崎幸吉, 김용옥.
2) J. A. Bengel, S. L. Johnson, “Estius, De Wette, Meyer, Edwards”(in 이상근), 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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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부족하고 못난 자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점은 다음 구절로도 뒷받침된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에 대해, 【9】[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못하다는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고백은 실제로 다른 사도들보다 못해서가 아니라(고후 11:5, 12:11. 참조: 갈 2:6-9), 이전에 교회를 격렬하게 핍박했던 자신(행 8:1, 3, 9:1, 2, 22:4, 5, 26:9-, 갈 1:13 등)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비추어 본 신앙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참된 겸손을 보게 된다. 그는 에베소서 3:7에서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하였고, 디모데전서 1:15에서는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1:2의 주석을 보라.)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겸손한 자의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서 7:24에서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였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박해자로서의 경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과 바울의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을 보다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다.
바울은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하였다.
바울의 취지는, 부족하고 못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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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멸망당해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카리티, χάριτι: 1:3의 주석을 보라.)로 그리스도인이며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든 다른 사람들-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 등-과 달리,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대신에 아주 값지게 만들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에코피아사, ἐκοπίασα: 4:12의 주석을 보라.)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한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바울의 수고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5, 12:11에 기록되어 있고, 복음 선교를 위한 바울의 온갖 수고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33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바울 서신들과 사도행전 곳곳에 그의 복음 선교를 위한 수고가 기록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요 사도가 된 바울의 생애는 핍박과 환난을 무릅쓴 수고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사도로서 수고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점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인식이 가장 교만할 수 있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행적에 비추어 너무나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그는 이 주제로 돌아와서 【11】[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저희는 앞에 언급한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다른 사도들이나, 자신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경쟁자들이 되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C. K. Barrett).
바울의 취지는 자신이나 다른 사도들, 또는 자신의 경쟁자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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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운명하셨고, 무덤에 묻히셨고, 부활하셨다고 전파했으며, 따라서 일부를 제외한 고린도 교인들도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에 삼켜진 예수 그리스도나 실제가 아닌 관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이다(롬 10:9). 사실상 죽은 자나 관념이란 믿음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것이다.
2. 부활의 중요성<15:12-19>
앞(15:1-11)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한 바울은, 이제 그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논한다. 부활이 없으면 자기의 믿음도 전도도 다 헛것이고, 그렇게 전한 자기의 동역자들이 거짓 증인이 되고, 여전히 불쌍한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을,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로 시작하고 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과 예언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됐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 (1)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일 것이라는 설,③ (2) 내세를 믿지 않던 에피큐리오파나 비인격적인 미래의 생명을 믿던 스토아 철학자들일 것이라는 설(F. W. Farrar), (3) 이방인 신자들일 것이라는 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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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이상근.
4) H. Alford, “De Wette”(in 이상근), M. Henry, J. A. Bengel, C. Hodge, A. Robertson and A. Plummer, R. C. H. Lenski, F. W. Grosheide, N. Hillyer, 김용옥.
※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0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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