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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영
- 2524
- 2017-04-26 19:56:34
다양한 이들과 함께 공존하는 시대에 너나없이 바쁜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지만 살다보면 간혹 주변에 참으로 딱한 이들이 있다. 어떤이의 표현대로, 보잘 것 없는 꽃 한 송이 겨우 피워놓고 큰소리 내며 떠들어대고, 으스대면서 남들이 보아주지 않는다고, 그 꽃 진다며 조바심 대며 안달하는 사람들...
북 치고 장구 치며 목소리 높여 사람 끌어모으기에 혈안인 길거리 약장수들에게 명약이 있겠는가?
효험적은 약일수록 과장된 선전이 많고, 속이 빈 인사일수록 자신을 자신이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 온갖 허풍을 떨어댄다. 목소리가 커지고 깊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명색이 구도자라면 자신을 성찰하는 의미에서 한번쯤 시선을 돌려 동일한 시대에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불교의 선승들과 가톨릭의 수사들의 모습들을 좀 보시라. 그들이 비록 신앙의 진리 면에서는 우리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은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 진리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그 치열한 정신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있는가?
이합집산, 합종연횡, 통제 불능의 공갈 단처럼 막장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오늘 우리들의 가련한 모습들은 무었을 말하고 있는가? 좌우 분별없이 시도 때도 없이 설쳐대는 천박함뿐인 품격 잃은 이들이 무리지어 다니면서 무슨 도모들을 하시려고?... 모두가 명심할 일이 있다. 명색이 구도자집단의 구성원이며 자칭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다면, 그 길이 무슨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길은 아니다.
오로지 엄위 앞에서 이교도들이 미처 모르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향하여 깨닫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대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사안이 그러하다면 이 길이 어찌 편안함을 보장하는 출세와 치부의 욕망으로 비칠 수 가 있겠는가?
스탠리존스의 표현대로,“인생의 계단에서 자신이 지금 어디까지 올라와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다음질문 하나만 던져보면 안다.” 나는 얼마나 지혜롭게 그리고 얼마나 깊이 있게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민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남을 돌보는 사람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남을 돌보려 하지 않고는 누구도 인격적인 헌신과 순종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그는 “내가 회심의 순간 무릎을 펴고 일어나면서 맨 처음 느꼈던 것은 남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두 팔로 온 세상을 안고 이 마음을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스티브 옥포드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란, 꿇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심장에 있다.”고 했다.
언젠가 W.C.C의 세계선교 보고서의 내용중, 전도가 가장 안 되는 7대 미전도 종족의 발표에, 4위는 중국공산당, 5위는 이슬람, 6위는 십대들, 7위는 교회에 와있는 안 믿는 사람들 이라고 했다. 7위에 명색이 성직자인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가? 오늘 일부 일탈된 우리의 모습들이 선교의 대상인 세상의 이교도들의 눈에는 어떠한 모습일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공정하고, 일관성이 있고, 남을 잘 배려한다는 평판이 있는 경우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잇속이 빠르고, 가볍고, 무례하다는 평판을 듣는 경우, 사람들은 누가 전하는 복음을 경청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오늘 너나없이 우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한다. 어리석음이란, “고집스럽게 우주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 가는 것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침을 뱉는 것이고, 정해진 선밖에 색을 칠하는 것이다.” 개인의 품격 잃은 천박함이 소속된 교단에 누(累)가됨을 알아 자중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