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IV (고린도전서 15:20-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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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9 20:50:40
[그러나 이제](뉘니 데, νυνὶ δὲ)는 “바울이 그려 왔던 음울한 그림들과 대조하여 즐거운 폭발을 시작하는 것이다”(A. Robertson and A. Plummer).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는 15:4의 주석을 보라.
[잠자는 자들(15:6의 주석을 보라.)의 ‘첫 열매’(아파르케, ἀπαρχὴ: 롬 8:23, 11:16)가 되셨도다]는, 구약 시대에 추수한 것 중에서 첫 열매나 첫아들이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바친 사실(레 23:10-11, 출 22:29, 23:19, 신 18:4, 느 10:35, 겔 20:40)을 배경 삼아 한 표현이다.
[첫 열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적으로(R. R. Williams), 또는 감사에 넘친 제물로 바쳐 졌으며(W. Barclay), 또한 장차 올 추수의 약속이 되기도 하였다(C. R. Erdman). 이런 사실은 느헤미야 10:35에, “해마다 우리 토지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라는 말씀과 에스겔 20:40의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헌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첫 열매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의미에서 구약 성경의 첫 열매는 이스라엘을 지시하기도 하였다(렘 2:3. 참조: 출 4:22).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첫 열매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적 후예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이나 요한 역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첫 열매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재형성된 인간들임을 의미하는 것으로(J. Calvin), 하나님의 부분과 보화 그리고 더욱 특별한 소유로서(M. Henry)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黑崎幸吉).}(약 1:18의 주석).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장차 성도들이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이 된다는 뜻이다. 바레트(C. K. Barrett)는 “인류의 부활(혹은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보장된다.”라고 하나, 여기서는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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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지(C. Hodge)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표자로서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백성의 부활의 보증이다.……바울 사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백성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만을 뜻하고 있지 않다. 사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감사 예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추수의 첫 번째 단은 전체 추수의 수확에 대한 보증과 확신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백성의 부활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빌 3:21).
바울은 앞 구절의 이유(원문의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앞 구절이 다음 구절을 해석하는 것으로서 중요하긴 하지만, 다음 구절에 의해서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이다”(C. K. Barrett). 두 구절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인 관념으로 바뀐 것”(A. Robertson and A. Plummer)일 뿐이다.
앞의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고, 뒤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죽음과 그의 후손들의 죽음 사이에 인과적 관련성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백성들의 부활 사이에도 그러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1:2의 주석을 보라.)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전자는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아담과 연합됨으로써 아담처럼 죽었다는 뜻이고, 후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두 연합의 본질과 그 결과들에 대해서는 로마서 5:12-21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①
22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 나타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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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저자의 로마서 5:12-21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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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다. 전자의 경우는 글자 그대로 모든 인류가 죽었고 죽을 것이므로 어려울 게 없으나, 후자의 경우가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 전자와 같이 취하여, 궁극적으로 전 인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설(Origen, Olshausen, De Wette),② (2)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가 종말에 영생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을 할 것이라는 설(요 5:28, 행 24:15, 단 12:2, 렘 51:39, 57, 사 26:19, 66:24, 욥 20:11, 21:26 등),③ (3) 신자들의 구원을 뜻한다는 설(고후 5:17, 살전 4:16 등)④ 등이 있다.
(1)설 곧 만인구원설은 성서 전체의 사상에 배치되므로 논할 가치가 없다. (2)설은 성서적 근거가 있기는 하나, 본장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인 성도가 영생을 얻는 것을 논하고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는 (3)설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완전한 구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3)설을 주장하는 핫지(C. Hodge)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다. ① 그 말이 두 절들에서 다 같이 제한되고 있다. 죽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살아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생명의 전달의 근거가 되므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확대될 수 있다. ② 여기의 동사 조오포이에테손타이(ζῳοποιηθήσονται)는 결코 악인들에게 적용되어 사용된 적이 없다. 이 동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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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in 이상근.
3) “Chrysostom, Theophylact, Meyer, Godet”(in 이상근), J. Calvin, 黑崎幸吉, A. Barnes, A. Robertson and A. Plummer, 이상근.
4) J. A. Bengel, M. Henry, “Ewald, Hofmann”(in 이상근), J. Wesley, H. Alford, T. T. Shore, C. Hodge, F. W. Grosheide, R. C. H. Lenski, T. C. Craig, W. F. Orr and J. A. Walther, pp. 332-333, J. Short, S. L. Johnson, L. Morris, W. Carter, D. R. Mitchell, N. Hillyer, W. H. Mare, C. K. Barrett, C. R. Erdman, G. D. Fee, D. S. Metz, M. E. Thrall, 內村鑑三,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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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도의 사역에 관련하여 사용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리스도가 원천이 되시는 생명을 그들에게 전달하는 뜻을 나타낸다(요 5:21, 6:63, 롬 8:11, 고전 15:45, 갈 3:21). ③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일반적인 부활을 다 같이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행 24:15), 본장 전체를 통해서는 단지 의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④ 병행 구절인 로마서 5:12-21에도 동일한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 이루어질 종말적 사건들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차례는 타그마티(τάγματι)로서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거의 군사상의 은유, 즉 ‘중대’, ‘기병 중대’, ‘무리’, ‘계급’ 등을 의미하였으나, “후대 그리스어에서(칠십인역을 포함하여) 그 말의 용법은 확대되었다. 따라서 일종의 집단, 군대, 또는 민간인에 해당하는 말이거나 장소, 지위, 심지어 법령을 뜻하는 말일 수 있었다”(C. K. Barrett). 또, “연속적인 순서의 의미로 후대의 저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클레멘스(Clemense)의 저서 「고린도에 보내는 서신」Ⅰ. 37과 41에서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본문의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무리가 아니시기 때문이다”(C. Hodge).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파루시아, παρουσίᾳ: 1:7의 주석을 보라.)에 그분께 속한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든 죽은 성도들이 먼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그 후에 살아 있는 성도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공중에 끌어 올려져서 주님을 맞게 되는 것이다(살전 3:13, 4:13-18).
이어서 바울은 【24】[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라고 하였다.
본절은 아주 난해한 구절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εἶτα τὸ τέλος)의 [나중](토 텔로스, τὸ τέλος)에 대해서는, 성도들에 이어 세 번째로 부활할 남은 무리들인 불신자들을 뜻한다는 설(요 5:28-29, 행 24:15, 계 20:11-15)⑤과 성도들의 부활 다음에 있을 세상의 종말, 즉 만물의 마지막과 구원 사역의 완성을 뜻한다는 설(마 13:39, 24:3, 6, 14, 28:20, 계 14:15, 벧전 4:7)⑥이 있다.
바울이 본장에서 불신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과 [나중](텔로스, τέλος)이 성경에서는 주로 ‘종말’ 또는 ‘마지막’의 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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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 A. Bengel, “Theodoret, Meyer, Walvoord”(in 이상근), “Lietzmann”(in C. K. Barrett), C. R. Erdman, “John Weiss”(in F. W. Grosheide), 黑崎幸吉, 이상근.
6) J. Calvin, “Chrysostom, Ewald, Findlay”(in 이상근), M. Henry, F. B. Meyer, J. Wesley, A. Clarke, F. W. Grosheide, A. Barnes, C. Hodge, W. H. Mare, R. C. H. Lenski, C. K. Barrett, T. C. Craig, J. Short, M. E. Thrall, L. Morris, N. Hillyer, S. L. Johnson, D. R. Mitchell, G. D. Fee, F. J. Dake, W. Carter, 박윤선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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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이어지는 설명 등으로 미루어 후자를 취해야 한다.
세상의 종말이란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이다.
[정사](아르켄, ἀρχὴν)와 [권세](엑수시안, ἐξουσίαν)와 [능력](뒤나민, δύναμιν)은, {그 당시의 어떤 종교에서 인간의 운명에 작용한다고 믿은 여러 계급의 천사적 존재의 명칭들이다(F. W. Beare, R. P. Martin).}(엡 1:21의 주석).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한 천사(엡 3:10, 골 1:16, 2:10)와 타락한 천사(엡 4:12, 고전 15:24, 골 2:15)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악한 천사적 존재들은 재림하실 주님에 의해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완전히 세워진 나라(바실레이안, βασιλείαν: 4:20의 주석을 보라.)를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이다. 즉, 성육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막 1:1, 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통치가 재림하셔서 원수들을 완전히 제압하심으로써 완성되어 끝나고, 이후의 영원한 세계의 통치권을 성부 하나님께 넘겨 드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으로서만 통치하실 것이다(눅 1:33, 계 22:3).
성부와 성자(고후 1:3, 엡 1:3, 골 1:3, 벧전 1:3. 비교: 요 20:17, 엡 1:17, 계 1:6)의 관계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나누어 가진 존재이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참조: 저자의 빌 2:6의 주석).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 사이의 기간(천년왕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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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결정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사건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사건들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하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 또는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이 암시되고 있다(참조: 26절).
다음 구절을 근거 삼아 재림주께서 세상 종말까지 직접 통치하시면서 원수들을 정복하신다고 하는 고대의 천년왕국론자들과 현대의 천년왕국론자들의 교리에 대해, 핫지(C. Hodge)는 복음의 주장과 본장에서의 사도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수정된 유대교 사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바울 사도는 혈과 육, 즉 우리의 현재 몸들을 이루고 있는 육체들은,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육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본장의 후반부의 전체적인 의도는 부활한 뒤에 신자들의 몸들이 지상의 조건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조건에 맞게 성자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바레트(C. K. Barrett)는 “이미 지적한 대로 이처럼 단계적인 그리스도의 통치가 내림과 종말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내림에서 절정을 달할 것이다. 이 점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뒷받침되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원수가 폐할 때까지 다스릴 것이고,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는 일은, 물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부활하는 때에(23절)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하였다.

※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1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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