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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결혼관과 이혼관
관리자
- 2359
- 2017-06-13 18:58:28
사회의 많은 문제는 그 기본 구조인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혼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혼할 만한 인격과 자립 능력, 그리고 배우자 및 자녀와 더불어 결혼생활을 해 나갈 인격과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다름없이 남존여비나 남녀차별 의식을 가지고, 아내를 쉽사리 내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러한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그 지도층인 바리새인들이 이혼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2. 결혼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견해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에서 무리에게 전례대로 영생의 복음을 가르치실 때,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참, 교활한 질문입니다. 그들이 잘 아는바 유대인의 결혼의 이상이 더 없이 고상함을 나타내는 말들이 있습니다. “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보낸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을 하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 젊은 날의 아내를 버리면 제단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실행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근본 원인은 여자에게 법적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남편은 기분 나쁘면 아내를 버리고 새장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나병에 걸렸거나, 구역질나는 가죽 만드는 직업을 가졌거나, 처녀를 겁탈했거나, 혼전의 죄를 잘못 고소했을 때만 이혼을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의 이혼법은 신명기 24:1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최초의 이혼 증서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도록 내가 당신에게 주는 이혼 문서요, 퇴거의 편지요, 해방 증서이다.” 후에는, 랍비가 좀더 정성스럽게 이혼장을 쓰고, 세 명의 랍비가 법정에서 승인하고, 공회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형식뿐이었고, 남편은 얼마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 것은 신명기 24:1의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간음만으로, 힐렐 학파는 광범위하게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은 힐렐 학파의 해석을 따랐으므로 아내들은 요리를 망치거나, 길가에서 길쌈을 하거나, 낯선 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남편이 있는 데서 남편의 친척을 경멸하거나, 목소리가 커서 이웃집에 들리거나 하는 하찮은 일로 이혼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혼을 옳지 않다고 하시면 율법을 무시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으시게 됩니다. 더욱이 이혼하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비난한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디바에게서 무슨 해를 당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혼을 옳다고 하셔도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혼 조건으로 간음만 인정하는 샴마이 학파를 지지하면, 힐렐 학파의 지지자들에게 반감을 사게 됩니다. 힐렐 학파를 지지하면 샴마이 학파의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남편들이 무분별하게 아내를 내버리는 죄를 부추기게 되므로 여자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러한 함정들을 생각해 낸 바리새인들에게서, 우리는 교활한 지혜이자 영적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한 질문에 예수님은 이혼이 옳다 그르다고 하시지 않고, 모세가 어떻게 명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을 내세워,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곡하여 악용했지만, 예수님은 신명기 24:1의 동기를 문제삼으셨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없이, 정욕을 좇아 밥 먹듯이 아내를 내버리는 악행을 줄이거나 막으려는 의도에서 준 계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이혼당하는 아내에게 이혼 증서나마 받게 함으로써 재혼의 길을 열어 주려는 의도에서 준 계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은 완악한 인간들에게 무분별한 이혼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됐습니다.
문병하 목사님의 글인데, 유대인들의 결혼관과 예수님의 결혼관의 중간쯤 되는 결혼생활에 대한 유머로 써도 좋을 것입니다.
노부부가 공원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는 노부부의 얼굴은 평안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때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웃기도 했습니다.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하는 듯한 그들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모든 것을 다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황혼이 물들 즈음이면 노부부는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늘 같은 시간에 나와 앉은 노부부의 모습은,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곁에서 이들의 모습을 봐 왔던 어느 교수는, 강단에서 진정한 대화란 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공감의 예로 들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노부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무 말씀을 안 하셔도 할머니의 마음을 아세요?”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할머니는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는 거죠?” 할머니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말을 하면 싸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여, 인간의 타락 전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결혼관에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결혼의 첫째 원리는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단절이 아니라, 자립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독립해서 반려자와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사회적‧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부부가 자립 능력이 있어야 부모도 공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둘째 원리는 남녀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5에 “아내에게 합하여”라고 했습니다. 합한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과 뜻을 무시하거나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부란 각각 독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창을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인 아름다운 조화를 위해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기분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주는 것입니다. 연애 감정의 사랑이 의지적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상대가 지각할 수 있게끔 관심을 보이고 배려하고 돌봐야 합니다. 상대에게 지각되지 않는 사랑은 상대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만 껴 준 금반지는 상대가 알 리 없지만, 손가락에 깨 준 꽃반지는 상대가 사랑하는 마음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해입니다.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이해를 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이해하기가 쉽고, 이해하면 사랑이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셋째, 대화입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마음의 표현인 대화가 있어야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도 이해도 하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넷째, 인내입니다. 태어나 자란 환경과 기질과 성격 등이 다르기 때문에 견해차나 갈등이나 다툼이 있으려니 해야 합니다. 충격들을 많이 받아요. 연애할 때는 전혀…오로지 나만을 위한 존재라 했는데…그 꿈을 깨야 됩니다. 부부싸움에 이겼다고 상 받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싸움은 4절인 시집과 처갓집까지 들먹이지 말고, 1절로 끝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이해하고 대화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결혼의 셋째 원리는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방편인 부부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란 기쁨과 활력과 생기를 주며, 서로를 밀접하게 결속시키는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셨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결혼 제도의 신성한 의미와 남녀동등의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 절대 불가는 아닙니다. 마태복음 5:32과 19:9을 보면, 예수님이 이혼 조건으로 음행을 언급하셨습니다. 음행 자체가 결혼 관계의 실질적 파괴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파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계산적인 결혼이나, 정략결혼이나, 강제에 의한 결혼이나, 어쩐지 맘에 들어서 한 결혼 등등이 있다는 점에서 이혼 절대 불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부당한 이혼과 부당한 재혼은 간음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3. 맺음말
첨단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회 병리 현상으로만 보고 사회적 처방만을 강구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더 먼저 사회의 기본 구조인 가정, 특히 하나님의 뜻인 결혼의 원리에 합당한 결혼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뜻인 결혼의 원리를 따라 결혼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결혼을 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인 결혼의 원리에 맞는 부부가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자립 능력을 기르고, 사랑과 이해와 대화와 인내를 하고, 건전한 성을 누리는 가정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직장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부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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