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언덕길에서 잠시쉬어 땀을 닦으며

현종서
  • 1492
  • 2017-07-10 11:43:33
개인구원에 촛점을 두어 온것이 전통적인 구원이해이다. 자기가 죄와 사망권세하에 종노릇하며 멸망의 자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되고 잠시 나그네 현세의 생을 살다가
죽어 영원한 본향 천국으로 가자는 것이고, 전도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내세 영생복락의 삶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구원은 현세의 구조악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인권, 평등, 자유, 복지등 현세의 행복를 찾아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이념에서 많이 배우고 그런 눈으로 성경을 본 것도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 본래의 메시지를 왜곡되이 볼 수도 있고 그 영향속에 무신론적 영향과 그들의 투쟁방법까지 무의식적으로 배우게된 면이 있고 공산당들은 이 통로를 이용하여 반기독교 활동을 하기도 한다.)

개인구원은 기독교회의 출발로 부터 지금까지 힘써야 할 사명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사회구원은 나치즘, 독재, 전제 정치,독점 자본가 등, 인권을 억압, 침해하고 불평등사회를 만들어가는 악한 경제 정치 문화등 인간을 노예화 하는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자는 것이다.(발르트 본회퍼는 이 사회속에서의 교회의 역활은 예수의 몸의 역활로써 예수가 이 땅위에 계실 때 어떻게 살으셨는 가? 결국 천국복음전하며 십자가를 진 삶이므로 그걸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원에 대한 교회의 노력으로는 미 복음주의 교회의 노예제도 타파운동,힛틀러 나치즘에 저항하는 독일고백교회의 반나치운동, 한국교회의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남미의 해방운동, 독일교회의 통일 운동등을 들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군사독재시 한국 일부교회의 민주화 운동도 이런 활동에 속할 것이고,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도 그런 활동일 것이다.
(촛점을 달리해서 활동해도 개인구원활동도 건전한 복음주의 운동이라면 사회적인 구조악과도 싸움에도 나서 그릇된 제도들을 고치는 사회 정치 활동을 직 간접적으로 하게 된다. 또 정치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 구원활동에 교회가 주도하거나 참여하기도 한다. 이 활동이 제도권에 대한 저항운동이나 정치활동에만 빠져 정의 와 인애의 원천자이시고 죄와 사망이라는, 보다 더 큰 인류 대적으로 부터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런 정치신학(민중신학포함)은 인간에게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며 긴급한 필요인 영혼 구원을 망각하게 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사회 구원에 촛점을 둔 이들속에도 거듭나고 성령체험한이들이 있는 가 하면 그런거(거듭남,성령체험등 영적구원을) 모른채 사회 정치 활동-사회악과 싸우는 일-을 예수따르는 일로 아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예수를 사회 구조악과 싸운 선배로만 보는 것이고 자기영혼의 구세주요 영생으로 이끌어줄 주님이시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는 자기영혼을 구원하는 일(죄와 사망으로부터)이 더 시급하며, 먼저할 일임을 일깨워줘야 한다.
전자를 위한 신학은 웨슬리의 신학이 탁월하고 후자를 위한 한 신학으로는 칼바르트,본 회퍼,몰트만,또 민중신학 등이 아닐까 한다. 내용은 인간구원의 신학이나 출발점과 강조점이 각기 다르고 성서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국은 상호보완의 성격을 가진 것이며, 후자의 활동속에도 기독교도의 활동이라면 개인의 거듭남과 성화활동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 동방교회 의 전통을 살펴보는 것은 서방교회의 이성주의 물량주의로 치우쳐진 것을 신비주의나 금욕주의로 교회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감리교회의 열린 복음주의는 성서중심과 웨슬리적 사상의 기반위에서 다양한 신학들도 배워 신학의 외연을
넓히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은 시간이 부족함으로 신학자들이 단순히 여러 신학들을 소개하는 정도를 넘어 성서와 웨슬리 입장에서 평가까지 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서구의 전통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아시아권의 전통종교와의 대화의 신학과 민중신학도 참고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토착신학을 창조하여 신학은 낯설고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용어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일반 상식인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환경의 구원과 내세 영생복락까지 쉽게 설명하여 납득될 수 있는 우리의 신학이 나와야 하겠다는 것이다.

윤성범 박사께서 그러한 생각으로 시도하여 내 놓은 게 "한국적 신학" 일명 "성의 신학" 이었다. 후학들이 이
뜻을 잘 계승하고 있지 못하여 엉뚱히 다원주의 신학이나 맑시즘적 운동권신학으로 흐른듯 보여 안타 깝다.

정통신학과 현대신학을 넘어서서,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진리를 어려운 신학용어대신 성경용어보다 약간 높은 수준, 또는 신문보다 같거나 약간 높은 수준으로 신학을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쉬운 것을 어렵게 쓰는 것은 현학자의 일이고,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 쓰는 것이 석학자의 일이라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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