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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歷史),누가 만들어 가는가?
오재영
- 1515
- 2017-07-18 21:25:45
하나님의 역사(歷史)는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일한 시대에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소명 앞에 순간순간을 본성을 거스르는 마음을 성찰하며 은혜로 주시는 미래를 꿈꾸는 마음으로 조국과 민족, 가까이 있는 이웃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희생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건설한다. 이러한 사람이 절망의 시대에 희망과 소망을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폴란드 출신의 한 신부가 일본에 와서 고아원을 설립하고 준비를 마친 다음에 운영기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가 그 운영기금을 모금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서 폴란드를 침공해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강제 노동에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군인이든지 평민이든지 모조리 수용소에 잡아넣고서는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누구든 거기에 한번 들어가게 되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강제 노동에 끌려 다녀야했다. 중노동에 먹을 걸 먹지 못하니까 병과 굶주림으로 어느정도의 시일이 지나면 반드시 죽게 된다. 그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곤 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포로들을 관리하기가 만만치 않게 되자 그때 독일군대가 아주 잔인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은 그 포로가 탈출에 성공하게 되면 이제는 그가 있던 같은 막사의 다른 사람을 대신 잡아서 공개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또 실패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는 것이다.
어느 날 이신부가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예감이 달랐다.
옆자리를 보니까 침대가 비어있었다. 이 사람이 혹시 탈출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는데 새벽이지나 아침이 될 때까지 돌아오질 않는다. 아침에 일어난 그 막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어제 밤에 탈출했구나, 잡혔으면 죽음으로 갈 것 이고, 성공했으면 우리가운데 대신 한사람이 죽어야할 텐데, 어떡하나?” 모두가 침통한 표정으로 아침에 나가서 도열해 섰다.
그때 독일 장교가 나오더니 “어제 밤에 아무막사에서 한 놈이 탈출하다가 잡혔다고?” 그리고 신부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끌려나온다. 다 죽을 각올 하고 있으니까, 찢겨진 옷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떨고 있는 그 모습이 뭐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그 처참한 모습을 그 신부는 참아 볼 수 가없었다.
그 독일 장교가 뭐라 하는 고하니 “이놈 이젠 너희들 보는 가운데 가스실로 가서 죽을 거라고,” 그리곤 끌고 간다. 그때 신부가 뚜벅 뚜벅 나가서 그 장교에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내 옆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 아는데, 집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세 어린애들이 있어서 자기는 항상 집으로 가야한다는 얘기를 늘 하고 있었다고, 그러다 지금 탈출하다가 잡혀서 죽게 되었는데, 이제 이 사람이 죽는 것은 혼자만 죽는 게 아니고 네 사람의 가족과 더불어 다섯 사람의 생명을 당신이 빼앗아 가는 거라고, 당신 집에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어린애들이 있을 터인데 충분이 이해가 되지 않느냐고, 다행이 나는 신부이기 때문에 나 혼자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니까 어차피 이 사람이 성공했으면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날 대신 죽음으로 보내고 이 사람은 가족들을 위해서 돌려보내면 안 되겠냐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가라고, 내가 대신 죽어주겠다고,” 뜻밖의 상황에 독일 장교가 ‘너는 생명이 아깝지 않느냐?’ 그 신부가 “나는 한사람이고 이 사람은 다섯 사람이라고” 그리곤 그 신부가 대신죽음으로 갔다. 해가지고 저녁이 되어 그날 온종일 강제 노동에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모두가 먹을 걸 먹지 못하고 피곤에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을 자질 못하고 있었다. 신부의 자리는 비어있고, 그 옆에는 신부대신 살아남은 사람이 자꾸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질 못하고 있었다.
이제 밤 자정이 다되어 가고 있을 때 그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그대로 살아남기로 하자, 아직도 세상이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데 우리 다 살아남기로 하자.” 그래서 새 출발을 했다고 하는 얘기다.
그런 말이 있다. “정죄는 부분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고, 사랑은 전체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오늘 구도자의 삶의 여정에 주변에 분노를 일으키며 실망시키는 이들 때문에 누구나 정죄에 휩쓸릴 때가 있지만 만약 자기 의(義) 에 기댐이 아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가 다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그 큰 사랑안에서 그 사명 때문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할까?
기독교 신앙을 “공간신앙이 아니라 역사신앙이라” 했다. 오늘 구도자들인 우리의 배려 때문에 자기주변이 조금 더 착해지고 아름다워지고, 그래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거창한 구호나 화려함은 없어도 영원과 연결된 하나님의 역사를 건설하는 이들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