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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에서 10여년 글쓰기하며 고민하던 것을 이렇게 결론 지었습니다.
오세영
- 1830
- 2017-08-17 15:49:01
선악과는 죽음을 주고 생명과는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과 죽음으로 떨어지게 하는 선악과이기에 참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생명과를 맺는 나무는 더 대단합니다. 죽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영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죽게 되는데 죽음의 상태는 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 갈 수 없는 타락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를 뱀이 말했던 것처럼 지혜롭게 만들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아담과 하와와는 다른 차원을 알게 되었고 선악의 개념이 뚜렷해 졌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던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싶지만 처음 지음 받은 순수와 무흠에서 타락이 된 것입니다. 처음 선악의 개념이 필요치 않았던 상태에서 이제 선악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처럼 선악을 정확히 분별하시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별된 선악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쌀 수 있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영향은 비판 판단 정죄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다툼과 분쟁 그리고 미움과 원수 맺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과는 죽은 아담과 하와를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이해와 사랑의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 즉 이분법적인 생각과 흑백논리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정죄하고 하와는 뱀을 정죄한 것처럼 판단과 정죄 그리고 비판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순수와 무흠의 상태에서 분명 타락한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명과일의 능력으로 사느냐! 선악과의 영향으로 사느냐는 타락이전의 아담의 모습이냐 죽음을 맞이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인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중대한 문제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던 그들은 비판과 판단, 정죄의 굴레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과 죽음의 상태였고 열매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악과의 관점으로 사느냐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사느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명나무의 능력인 이해와 사랑,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살아야 영생의 길입니다.
우리가 모든 분쟁과 비판 정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속담에 “모든 것을 알면 비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말씀도 아닌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말입니다.
운전하는 이들은 누구나 한두 번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너무나 급한 상황이어서 본의 아니게 얌체 운전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 차량의 사람들은 비판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결국 욕설을 퍼 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얌체 운전자의 사정을 다 알게 되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로가 잘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의 형편과 생각을 잘 듣다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감리교회 안에 있는 분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화해중재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입장이 있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분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이 잘못했다고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비판과 판단, 정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타락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악한 것들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악한 기질과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으로 정죄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질과 성품은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모태로부터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자란 환경으로 인하여 어느 한 사람의 고유한 기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만든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말씀과 신앙훈련으로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태어나서부터 한 사람이 자란 환경과 배경은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만들기에 각양의 사람을 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나무 되신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관점에서는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고, 헤아림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헤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을 헤아리는 것으로 주님도 우리를 헤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살아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던 그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선악의 개념에만 사로 잡혀 있으면 그 결과 비판과 판단과 정죄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한 다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까요?
우리는 생명나무의 능령과 관점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사실 알고 보면 약한 존재이며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 들입니다. 또한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많은 흠과 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을 선악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 붙잡아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면 얻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도 원수도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하여 비판하고 판단했던 그 일을 어느 날 내가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 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롬2:1-3)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생들에게는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시고 판단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판단과 정죄는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쉽게 정죄하지 않으시고 길이길이 참으시며 용서하십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지만 순수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기에 쉽게 비판과 정죄의 심판을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다릅니다. 우리보다 비교 할 수 없이 선악을 분별하시는 주님께서 비판과 정죄는 주님 것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다 알지 못하며, 네가 아는 것이 전부도 아니고 네 생각일 때가 많다”는 것이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선악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까!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선악의 관점에서 보는 눈과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풍성함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마지막 날 정죄와 심판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