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의 바다 위를 걷는 주

관리자
  • 1821
  • 2017-08-22 20:50:21

  1. 시작하는 말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며 끌탕하기에, “되면 어떻게 할 거야.”하고 같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그 자신은 물론,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되면 어떻게 하나.’ 하지 않고,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생각보다는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생각이 낫습니다. 그런데 실상, 실패한 사람들은 대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시도조차도 안 합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적극적 생각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들이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은, 내 인생도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 예수님은 생각이 아닌 믿음을 문제 삼으셨고 중시하셨습니다.

  1. 풍파의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 예수님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를 보내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계셨습니다. 현대는 복잡하고 분주한 시대이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한적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로 사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배를 탄 제자들은, 풍파와 싸우면서 노를 저어 가느라 탈진했습니다. 노련한 어부 출신 제자들도 풍파를 어쩌지 못하고 허덕허덕 노를 젓다가 탈진했습니다. 자기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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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계에 달한 전문가와 대가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탐욕이나 분수에 안 맞는 생각이나 행동, 자신이나 남의 죄와 실수, 천재지변 등으로 풍파를 만납니다. 혹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닌 삶을 사느라 풍파를 만납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에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족적 풍파이자 국제적 풍파인 6‧25 남침 전쟁을 북침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고, 일선에서의 남북의 군인들의 작은 싸움이 확전된 것이라고 교육하는 이들이 있는데, 실상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자주적으로 스탈린 독재 치하의 소련을 48번이나 찾아가고, 중국의 모택동도 찾아가서 허락을 구하고,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는 문서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거나 잘못 믿어서만 풍파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믿고 순종하는 중에도 풍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성장시키고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혹은 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혹은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인 풍파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로 인한 불가항력의 풍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풍파를 만나면, “왜 내게 이런 풍파가…” 하면서 원망하며 거부하느라 남아 있는 더 많고 좋은 것들까지 풍파 속에 던져 버립니다. 밥도 못 먹거나 안 먹고, 잠도 못 자거나 안 잡니다. 밥통이 풍파를 일으켰습니까, 눈이 풍파를 일으켰습니까? 왜 밥통이나 눈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밥통도 눈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고생입니다. 입맛 없으면 죽을 물에 말아 삼키고, 잠 못 자면 누워서 성경을 읽는 게 좋습니다. 저는 성경 100독 할 테니 배우자를 달라고 한 후, 한동안 성경이 수면제인 줄 알았습니다. 풍파 때문에 천하하고도 안 바꿀 목숨까지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풍파란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받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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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물을 주고 떠나는 것입니다. 모든 풍파는 그 풍파만이 줄 수 있는 값진 보화를 들고 옵니다. 그러나 풍파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는 사람은 그 보화를 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닥친 풍파를 너무 크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겪는 풍파 중 한 풍파가 찾아왔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죄악이 범람하고,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사는데,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하는 말세 후반에 사는데 왜 풍파가 없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풍파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하여 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감동을 주는 불후의 명작들은 대개 풍파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작품뿐입니까? 어떤 인생이나 위대한 선장은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풍파가 이는 바다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풍파를 만난 내가 어떻게 하기를 주님이 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순종하느라 풍파를 만났다고 해서, 풍파가 일자마자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풍파와 맞서 악전고투하다가 탈진하여 더 이상 어찌할 힘이 없을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부터 지금의 오전 3-6시에 해당되는 로마 시간의 밤 사경에 풍파의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행위에 대해 중요한 것은 이성적 관점을 좇아 예수님을 그냥 인간으로 보느냐, 성령에 의한 영적 관점을 좇아 예수님을 육신으로 오신 주님이심을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주님에게서 자연도 지배하시는 신적 권능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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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풍파의 바다라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성자 하나님이신 주로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을 구하시려고 풍파의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주님의 제자이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아니라, 아직도 옛사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동안 주님의 여러 기사와 이적을 본 제자들에게 정상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이내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위해 풍파의 바다 위로 걸을 존재가 있다면 주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풍파를 만난 자신들을 구하시려고 바다 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령이 가끔 해상에 나타나 풍랑을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으로는 대중의 미신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는 신학자와 교역자와 교인들이 있고, 가현설처럼 일종의 유령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령으로 여겨 비명을 지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풍파이건 유령이건 죽음이건 두려워 말고 안심하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영생의 주가 왔으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풍파가 있습니까? 소용없는 거부를 하거나 원망을 하지 말고, 받아들여 바다 위라도 걸어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풍파 속의 우리를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고, 누구도 도울 힘이나 도울 형편이 안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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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라도, 능히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실 이는 주님밖에 없으십니다. 온 세상이 나를 외면해도 주님은 반드시 나를 찾아오십니다. 제가 산전수전에다 영적 전쟁 등 온갖 풍파를 겪은 결론은, 풍파에 빠지는 것이 정말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설령 풍파에 익사한다 해도, 믿는 우리가 천국밖에 더 가겠습니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이시라면 기적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하자마자 주님은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주님을 향해 갔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갈 때는 인생 풍파 위를 걷는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이한 사람이 간증을 했습니다. 잘나가다가 불의의 감전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는 바람에 목 위만 살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려는데, 움직일 수가 없어서 자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날마다 원망과 저주와 피눈물입니다. 탈출구 아닌 탈출구가 있다면, 죽는 것인데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습니다. 한번은 몹시 갈증이 나는데 곁에 물통이 있는 걸 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어찌해서 물통을 엎었지만 물 한 방울 입에 넣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주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그 몸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전도자가 되었고, 남편이 그녀의 몸이 되어 주었습니다.

  1. 맺음말


말씀을 듣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던 베드로가, 그만 눈을 돌려 바람을 보고는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두려움에 질린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질렀고,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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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이 베드로를 데리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풍파 덕에 예수님이 영생의 주이심을 깨닫고 믿은 것입니다. 풍파가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이나 태도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풍파의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5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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