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리더는 자신의 위기를 어찌 극복해야 하는가?

오재영
  • 1487
  • 2017-09-23 18:18:08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출간된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리더를 떠난다.”의 ‘네이선 콘래드’ 목사의 진솔한 고백이 혼돈의 시대, 리더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청년사역, 목회치료 가르침, 설교와 리더십 개발 분야에 탁월한 재능으로 인정받든 그가 어느 날 4명으로 팀을 이뤄 평소 즐기든 빙벽 등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추락을 영적 리더의 사역과 비교하는 내용이 감동으로 다가 왔다. 그가 주변의 여러 빙벽을 등정한 후에 이제는 도전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뉴, 햄프셔주 ‘크로포드노치’에 있는 프랑켄슈타인 절벽의 유명한 루트인 ‘드라큘라’의 빙벽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가 빙벽 등반을 즐기는 이유는, 자신의 한계상황을 극복해 가면서 팀웍을 이룬 동지애와 서로 돕는 고마움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화요일, 노련한 세 명의 등반가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드라큘라 빙벽을 향하면서는 선등(先登)에 대한 자신감까지 느꼈다. 한 친구가 후등자로 따라와 빙벽에 남은 장비를 치워 주기로 하고, 그동안 선등했던 빙벽보다도 최소한 1.5~2등급이 높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실력발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의 짜릿함까지 느끼는 들뜬 마음으로...

내가 추락하다니, 믿을 수 없어.

사람들은 등반을 위험하고 무모한 일로 여긴다. 노련한 등반가의 표현대로 “대담하고 위험한 얘깃거리가 많은”스포츠 이지만, 등반 전에 충분한 연습을 하고 안전장비를 잘 사용하면 위험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가 모든 준비를 갖추어 그 드라큘라를 오를 때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고 자신의 등반 실력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높이 34미터 빙벽의 3분의 2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빙벽에는 이미 두 개의 확보물을 설치한 상태였다. 확보물로 쓰는 얼음 나사못은 추락을 방지하는 고정 장치인데, 그는 세 번째 얼음 나사못을 설치하려다가 욕심을 부려 조금 더 높이 올라갔다. 안간힘을 써서 빙벽을 오르는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두 번째 나사못에서 10미터 정도 위 지점에서 근육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등정에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과 함께 심지어 나사못을 더 박을 힘도 낼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추락 하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전신에 공포감이 달라붙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피켈을 최대한 깊게 찍어 넣고 등산화로 빙벽을 차서 발밑을 단단히 고정 시킨 뒤 한 친구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그는 카리비너(금속고리) 하나를 위로 던졌다. 이제 로프를 고리에 끼우면 추락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첫 번째 시도에서 연결에 실패함으로 다시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발은 미끄러지고 피켈은 빠지고 곧장 20미터 아래로 추락과 동시에 튀어나온 얼음에 부딪치면서 튕겨나가 로프가 팽팽 한대로 빙벽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더 추락할 것 같은 공포의 엄습과 함께 추락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피켈을 잡았다. 자신이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것과 부상을 당했다는 것은 알았으나 얼마를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놀랍게도 의식은 살아있었다. 그 순간에도 그는 과거에 빙벽 등반 중에 발을 헛디딘 적은 있어도 추락은 처음이었기에, ‘내가 추락하다니, 믿을 수 없어,’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후에 함께 동행 한 친구는 “그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 봤다”라고 했다. 추락직후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도움과 의료진,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가는 동안 에도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이마의 상처와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한쪽 눈은 보이지 않는 채로...

그는 사흘 동안의 치료와 간호를 받은 뒤 퇴원했다. 사고에 비해 부상은 전체적으로 경미한 편이었다. 비골골절, 새끼손가락 골절, 두개골골절, 눈 뒤의 안와 골절...

추락이 자신의 삶에 남긴 것들...

지나고 보니 그는 몸이 다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고 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몇 달간 그의 영혼과 인간관계의 감정이 망가졌고,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지난 3년 동안 그들이 함께 했던 빙벽 등반을 모두 녹화해온 친구가 있어, 이번 등반역시 그의 비디오에 담겨져 사고 후 그 친구는 응급실 의사 및 등반 가이드들과의 인터뷰 장면을 더해서 14분량의 동영상을 편집한 뒤 ‘비메오’에 올렸다. 동영상(https://vimeo.com/20549603).

그들은 동영상이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전국의 등반가들은 그의 실수를 보며 서로 분석하고 공유하면서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는 금세 엉터리 빙벽 등반의 대명사가 되었다.

당시 미국 최고의 등산가 윌 가드(Will Gadd)는 그 동영상을 자신의 블러그에 게시하고 그의 등반에 대해 유익하지만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장문의 두 게시물에서(제목 하나는 ‘이런 꼴이 되지 않는 법’)가드는 등반가들에게 그는 “선등 자가 될 실력이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발동작이 “형편없고” 더 일찍 추락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첫 번째 게시물의 결론 부분에서 가드는 그는 이렇게 생각해야한다고 독자들에게 일갈했다. “그는 여생을 불구로 살지 않게 된 건 기적 같은 천운이었다. 그는 빙벽 등반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한다.”

자신을 열광적인 등반가로 자처했던 터이기에 그의 말은 그의 영혼을 깊이 파고들어 상처를 냈으나, 하지만 가드의 말은 백번 옳았다. 그는 그의 글을 읽은 뒤 이메일을 보낸다. “이건 등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 사고는 그의 영혼의 망가진 데를 집약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통제와 인정과 같은,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우상에 집착했고 그의 생활과 인간관계, 사역 이곳저곳은 병든 습관에 물들어 있었다. 등반 기술의 실수와 버릇, 심지어 ‘죄’가 자신의 생활 전반에서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으나 그 사고 후에 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등반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등반가들은 동영상을 돌려보며 그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남자는 자기 실력을 모른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본인 스스로 그런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자신의 본능은 드라큘라 빙벽을 선등할 실력이 부족하다고 경고했을지 몰라도 새롭고 도전적인 일을 해보겠다는 흥분에 들떠서 그런 경고 따위는 무시했다.

등반가들은 루트에 오를 때 아드레날린이 나와 판단력이 흐려지는 상태를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면 아드레날린은 등반가의 피로와 안전, 상식까지 모든 것을 제압해버린다. 동시에 아드레날린에 취해 천하무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근육은 풀리기 시작을 한다. 때문에 경험 많은 등반가는 그 시점에서 그는 멈춰 선 다음 얼음 나사못을 박은 채 쉬든지, 그렇지 않으면 등반을 포기하고 빙벽을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아드레날린 흥분 상태에 빠진 그는 위험 천만 하게도 계속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거듭 합리화 했다. ‘나는 괜찮아, 조금 있다가 쉬면 돼. 충분히 해낼 수 있어, 계속 움직여야 하니까 지금은(아니 절대로)멈출 수 없어.’ 그가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했다. 이미 마지막 확보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체력은 고갈됐으며, 휴식과 안전 조치는 무시됐다. 그래서 노련한 등반가라면 지나친 아드레날린 고조 상태에서는 등반하지 않는다. 탈진과 과욕으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그는 자신의 그러한 등반습관이 그의 인생에는 어떻게 반복적인 영향이 있는지를 따져 보기를 시작한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사역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무심코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위반하면서 살아왔던 모습까지도 보게 된다. 그는 사역으로 인한 피로와 아픔에 대해서도 단순한 전략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즉 ‘입 다물고 하던 일 해. 더 어려워지면 머리를 처박고 더 열심히 일하자.’

다행이도 이제 그는 인생과 사역을 더 건강하게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에서 “영적 리더들은 가장먼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부르심의 핵심과도 닿아 있는 문제이다”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무한 경쟁시대의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교회 문화에서는 특히 그렇다. 스카지로는 이어서 말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한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과욕과 스트레스, 탈진에 빠진다.”

사고 후 그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든 이러한 성향의 뿌리를 발견한다. 성취와 인정이라는 우상을 쫓아왔기에 한계를 만날 때마다 화를 내며, 한편으로는 교인들에게는 훌륭한 목사, 유능한 설교자,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목자로 인정받고 싶은 모습들... 이것은 자신이 일주일에 75시간씩 일한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살면서도 영혼은 공허해지고 몸은 탈진했으며 인간관계는 금이 갔다. 이러한 불도저식 사역방식은 자신만 괴롭힌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위태롭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목사로서 아드레날린 분비가 최고조에 이르면 오히려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소홀히 대하며 성도들에게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지 등반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경험은 그의 파탄 난 그의 영혼을 축약해 보여주고 있었다. 추락 사고가 난 지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정기 적으로 자신에게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아드레날린 분비가 최고조에 이르는 때는 언제인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강력한 호르몬의 분출을 맛보고는 그것을 마치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며 새로운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열정이라고 혼동하는 것은 아닌가? 즉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나를 위한 일인가? 나는 성령에 취해 일하는가, 아드레날린에 취해 일하는가?

지금도 그는 자신의 사역 방식에 영향을 주는 우상을 찾아내는 중이며, 리더는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이 일주일동안 일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이러한 한계들이 누군가의 사역이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축복이요 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에 힘쓰고 있다.

등반가들 대부분은 실수를 저지른다. 해마다 많은 이들이 추락사고로 낙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다. 그중에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실수로 인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추락 사고를 직접 보면서 무슨 실수를 했는지 포착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동영상과 인터넷 덕분에 그의 실수는 전 세계로 퍼졌다. 그동안 등반가들이 실제 상황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보여주면서, 안전사고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교훈까지 주는 동영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등반가들의 반응은 빠르고 강하고 거칠었다. “무식의 극치”, “장비를 다 팔아 치워라”, “이놈은 곧 죽겠군,”같은 악플이 달렸다. 여느 리더처럼 그도 명예를 중시하기에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기에 그의 동영상을 보고 분석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은 더 황망하고 창피했다. 어떤 사람은 윌 가드의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내가 이 남자라면 다시는 뉴햄프셔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겠다.” 그도 동의하기에 숨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체면만은 지킬 수 있는 이야기정도는 지어내고 싶은 마음과 타락하고 불안한 자신의 마음의 실패가 드러나는 것 보다는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이제 철인행세는 그만두고 정직한 멘토를 찾으라.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빙벽 등반에도 그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있다. 멘토링과 학습,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등반가는 로프 매듭 법, 휴식 방법, 안전점검과 재점검, 발동작, 자기 제동과 자기 확보 방법, 나사못 설치, 루트 선택, 장비의 남용과 손상을 점검하는 법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진득하게 배워야한다. 학습 곡선은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는 겸허한 자세로 이런 것들을 다시 배우고 등반가로서의 실력을 차분히 쌓아야한다.

그는 그 추락사고로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뜻밖의 멘토를 찾았다. 그를 맨 처음 비판했던 윌 가드였다. 그는 블로그에 첫 게시물을 올린 뒤 직접 몇 차례 이메일을 통해 실제적인 조언을 해 줬다. 우선 톱로핑 등반을 연습하라고 했다. 또한 돈이 들더라도 노련한 등반가에게 훈련을 받으라고 강조했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거나 죽는 것보다 하루 강습비가 「훨씬」쌉니다.”

그는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되도록 당신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하는 얘기들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타당한 말은 받아들이고 악담은 무시하면 됩니다. 지하실에서 커피를 마시든지 무얼 해도 좋으니 모든 과정을 되새겨 보세요... 잘 아시듯이 문제는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거예요. 나도 돕기로 했으니까 같이 즐기면서 발전해 봅시다.”

이것은 목회 현장에도 필요한 말이었다. 사역을 혼자서 하지마라, 멘토를 찾아라,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사역 경험이 더 많고, 목회 기술 전수가 가능하며, 당신의 맹점을 지적하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라. 시간과 돈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역이 무너지고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자신이 귀를 기울여야할 사람은 누구인가? 사랑과 용기로 나의 죄와 약점, 나쁜 버릇에 대해 지적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실제로 그런 ‘고언’을 듣는다면 달가워할까? 즉 “무섭도록 정직하면서도 사랑과 신뢰를 담아 나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교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진 철인(鐵人) 행세를 그만두고, 친절하고 환대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과 리더십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배우고 있다.

목사도 이성을 지닌 사람이기에 주변의 평판과 인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역전반에서 미래 ‘최고의 영웅,’ 신화적인 목사에 관한 미담의 주인공을 꿈꾼다. 언제나 유능하고 천하무적이며 제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의롭기까지 한, 영적 리더로서, 하나님을 위해 영웅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러나 이러한 신화에 한번 빠져들기 시작을 하면 그는 이미 교활한 사단의 치명적인 덫과 올무에 걸린 것이다. 이제 그는 불건전한 습관과 악한 욕구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고 실패와 비난을 무서워하는 노예가 된다. 또 일에만 몰두하고 성령의 역사는 무시하며 영웅이 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치명적인 위기의 때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실패를 고백하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비로써 하나님께 만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가 있다. 사하라의 불꽃, 샤를르 드 푸코 가 자신의 한평생을 표현하기 위해 정한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거하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 이었다. 오늘 다양한 조직이나 교회, 혹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열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사명 선언문과 표어들이 난무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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