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오디세이아

이주익
  • 2277
  • 2017-10-18 18:12:19
- 한국사 오디세이아 -

고대 그리스의 유랑시인 호메로스(Homeros, B.C. 800?-B.C. 750)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는 인간이 살고 있는 국가 사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걸고 있다.

  • 주신(主神) 제우스는 사랑하는 딸 아테네의 간청으로 오디세이아의 안전한 귀향을 위해 神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神들은 48시간에 걸친 회의를 통해 그가 유혹을 물리치고 귀환해 새로운 시민의 세상을 열 수 있도록 아홉 가지 갈등과 아홉 가지 모험을 제시하고 민회(民會)에서 이를 풀 도록 허락했다.  귀향한 오디세이아는 그의 도시를 아테네라 칭하고 神들로 받은 민회를 다스림의 도구로 삼았다.


오디세이아에 의하면 최초의 도시 국가는 재민주권(在民主權)을 바탕으로 민회가 통치 권력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대한민국이 이런 국가인가?> 고 말이다.

국가에 대한 개념은 동양권에서는 명(明)나라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1610-1695)에 의해 정립된다. 명말(明末) 청조(淸朝)의 중국 사회는 정치적으로 천붕지해(天崩地解)로 불릴 정도로 대 혼란기였다.

이에, 황종희는 지금의 국가는 왕권이 사직(司直)을 지배하고 사직이 백성을 지배하고 있어 종래는 망(亡)하게 될 것이나, 앞으로 오는 국가는 백성이 사직을 지배하고 사직이 왕권을 지배하는 군객민주(君客民主)의 새로운 국가가 될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황종희의 영향이었을까, 조선(朝鮮)은 1897년 10월 12일,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는 한편 형식적이나마 중추원(中樞院/사직)이 백성을 다스리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새로운 제국건설에 함께했던 독립협회(개혁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수구파는 전제군주제의 유지를 주장했다.

이 두 파의 주장은 지금의 정황과 같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다가, 한 쪽(독립협회)에서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 거리에서 1만 명이 참석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고, 러시아 절영도(絶影島, 부산 영도) 조차(租借)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자주독립강화를 결의했다.

이 일로 인하여, 신생  대한제국은 한반도를 둘러 싼 국제 세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됐고,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추진, 1899년 11월 2일 중추원(의회)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이 민주혁명은 수구파들의 모략(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림)으로 고종 황제를 격노케 했고, 이 일은 독립협회 간부의 체포와 해산, 개혁파 정부의 붕괴를 가져오게 했다.

자주독립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일본이 가세함으로 정권을 잡게 된 조병직의 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를 제정(제5조), 공포 했던바 국호는 대한제국, 정체는 전제군주제이나 실상은 일본의 친위 쿠데타에 의한 허수아비 정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된데 이어 합병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황종희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중국고전/군주독재를 비판한 민주적 정치론)에서 말한 민주민회, 민의가 바로 서 있는 국가만이 국가로서 존재한다는 이론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2017년 10월 18일

이주익 목사(서대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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