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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문제에 대하여
- 1915
- 2017-11-03 20:03:08
오늘 어느 후배에게 요새 감신 문제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물으니, 더 이상의 관심을 끊었고 잘되든 잘못되든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감신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컸던 그의 말이었기야 나 또한 같이 염려할 수 있는 상대마져 없는 것인가 생각되어 답답하기만 하다.
20여년전에 감신에 신학문제가 불거지고 관련 교수들의 신학사상, 그로인해 한국 감리교회 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나름대로 고민하며 연구한 글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상기하고자 한다.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견해
유동식 교수께서 한국감리교회의 방대한 사료들을 조사 활용하여 한국감리교회사를 서술하였다. 그분의 노고를 먼저 치하드리고 한국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밝혀 보려고 한 시도를 일단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감리교회 교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5,000명의 동역자들과 130만 감리교도들의 자아인식이 추호라도 그릇되어서는 안되겠기에 한국 감리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유박사와 다른 시각을 말씀드리며 이를 기점으로 더 깊고 넓은 연구가 있어 한국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감리교신학의 정체성을 바로 앎으로 감신과 관련된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유교수님은 <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초석을 놓은 이들은 선교사들이라 하여 아펜젤라, 스크랜튼, 죤스를 들고 1. 체험적 복음주의, 2.땅에 이루어진 하늘 나라, 3.구원의 완성인 영생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였고 그들에게서 배운 한국 초기 전도사들,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등을 드는 데 그들은 복음을 영적, 사회적 , 문화적으로 이해하여 동양종교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시도하였다>고 하였다.
여기 부언하여 언급할 것은 한국 감리교회및 개신교회의 정식 전래는 미국의 제2 각성운동과 무디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고 죤 모토의 대학생들에게 준 세계선교의 도전에 응전하여 동양 여러 나라에 복음을 들고 들어간 젊은 들 중의 일부가 한국에 들어 왔으며 그들의 신앙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고 그들에게서 배운 한국 지도자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한국 재래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 적 신앙의 해명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에 이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바탕위에서 성장하며 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학자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인바, 그들은 이미 복음주의 신앙으로 무장된 한국감리교회의 50년 역사의 터 위에 미국에 들어온 구라파의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아 소개한 입장이다. 그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말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본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며 조선 감리회가 창립되는 데 여기에 제출된 교리적 선언에 양주삼의 신앙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근본주의 신학의 배경이 아니라 복음적 자유주의의 신학이었다고 하였다.이러한 자유주의 적 신학이란 진보적이며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하는 생명체로서의 감리교회의 신앙과 선교를 해명하고 뒷받침하는 신학이라고 하면서 교회와 교리는 물론이고 성서에 대해서도 역사적 비판적 연구 접근을 하는 것이 양주삼과 한국감리교회의 신학노선이라>고 보았다.(유동식)
그리고 <합동 전권위원회 위원장 웰치 감독은 새 교회의 형성목적을 세가지로 말하여 1. 진정한 기독교회가 되게하는 것 2. 진정한 감리교회가 되게 하는 것, 3. 진정한 한국적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위원들과의 합의 사항을 말하였다. 그리고 교리적 선언에 예수의 성신잉태,십자가 위에서 흘린피로 인한 속죄, 부활과 승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지 않기로 가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회는 근본주의가 아닌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밟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토의에서 양주삼의 말대로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사실인 하나님의 아들의 "동정녀탄생, 속죄의 죽음,새몸으로서의 부활, 승천, 재림과 심판을 믿는 다는 말은 따로 언급안해도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다 하는 말씀속에 위의 주제들을 다 믿는 다는 뜻이 들어있는 실제적인 표현(p.520)으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하여 이해하고 넘어갔다.이렇게 볼 때 기독교교리의 소위 5대 근본주장을 안믿어 뺀 것이 아니고 일제의 탄압하에서 합동이 단결을 위한 뜻도 있는 터에 당시의 정치 , 사회상으로볼 때, 사회 정의 면에 대한 강조 의식을 담기위한 간명한 교리적 선언이었다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동향을 보거나 기독교회나 감리교회의 본래성을 보나 그 조항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서 문서로 다시 표현을 안한 것 뿐이다. 그러한(넣어야 한다. 그럴 필요가 따로 없다) 의견이 있어서 토론을 하였다는 자체가 이것을 예측하게 해 준다.
아마 전 교회에 물었으면 아마 99:1로 삽입을 찬성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후일 조직신학자 정경옥은 그 교리적 선언을 해설하면서 그 선언의 근본정신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라고 말 한 것(p.563)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유동식은< 정경옥을 복음적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하였는 데, 그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자기의 근본입장과 같다고 하였다.> (p.558) 그러나 바르트야 말로 목회에 비효율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려고 평생 노력한 신학자이며(윤성범) 자기 신학을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Einfu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EVZ-Verlag Zurich) 비록 정경옥이 미국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 디벨리우스와 불트만의 형식 비판연구를 소개했을 지라도 그 입장에 선것은 아니었으니 신약학자 김철손은 " 그는 성서연구방법을 바르트에게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성서를 많이 알고 내용을 다 파악하고 그리고 어디 까지나 복음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고 이론화하고 현실화 하고 생활화하였다."(김철손,"정경옥과 성서연구", 신학과 세계 1979.5 p.27)고 했다.
정경옥은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문제와 감리교 근본정신을 복음주의로 보았다.(pp.563-564) 그는 감리교신학의 뿌리를 복음주의로 보았는 데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필자의 생각은 감리교인이라면 어느시대 어느지역에 살더라도 이 뿌리를 바꿀 수는 없다고 본다. 뿌리를 바꾼다는 것은 타교파 내지는 타종교로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주삼이나 정경옥이 감리교신학의 뿌리를 바꾸려 했다면 그는 감리교회에서 나갔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뿌리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경옥의 입장은 신학은 자유롭게 넓게 하여도 신앙은 보수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 가리켜 윤성범은 "그는 감리교회 복음주의 신학을 터득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신학과 세계 제5호,p.20)고 하였다. 이러한 복음주의란 혹 진보적 복음주의라 칭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감리교회는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분명한 복음주의의 맥을 가지고 흘러왔으며 하디 선교사를 통해 그 복음주의의 정신을 재 확인시켜주었고 그가 1910년 이래 10여년간 협성신학교( 옛 감신) 교수,교장으로 근무하며 그 영향을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물론 성경의 축자 영감설 주장은 아니었다.
한국감리교회의 신학형성은 3-4인의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 선교사중에도 노불의 영향이 중요한데, 그는 드루대 신학박사로서 로마서, 전도론, 영혼론 등을 가르쳤다. 그의 신앙배경 역시 무디의 부흥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정통주의 적 신학에 반립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와 활동과 의의를 적극 인정하는 신학, 그리스도교 대사전,p.891)은 술라이어 마허, 헤겔,바우르, 스트라우스,리츌등으로부터 미 감리회 신학계에 흘러 들었고 WCC와 한국의 유학파 교수들을 통해 들어 왔으니 이를 이장식 교수는 복음적 자유주의라 하였다. (이장식, 한국교회 100년,한국기독교문화진흥원, 1987) 유교수도 이를 보고 한 말인듯 하나 그런 신학적 경향은 한때 미국 동부신학교의 신학적 경향으로 영국 미국의 본래적 감리교회나 한국감리교회의 출발정신을 간직한 한국 교회 현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정체성이 아니라 혹 일부 신학자들의 정체성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 학자, 행정가로서 골고루 경험하며 전 한 국감리교인들의 존경속에 지도력을 발휘했던 변홍규, 그이야 말로 일제 해방과 6.25사변의 혼란기를 거쳐 안정된 감리교회의 감독이 되기까지 지내며 새로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한 분이 아닌가 한다. 그를 가리켜 홍현설은 " 그는 웨슬리의 복음주의의 전통을 성실하게 답습한 분이라고 (p.814) 하였는 데 그의 재임기간에 미 감리회로부터 선교재단 이양을 받고 사라왁, 볼리비아, 파키스탄, 월남,일본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성장된 감리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그분이야 말로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감신에서 30여년 학장직을 지낸 홍현설 목사의 신학적 정체성이야 말로 감리교신학의 정체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 복음주의 영향하에서 자라서 신학을 하다가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하여 바르트와 라인홀드니버의 영향을 받았으나 감신에서 학장을 지내며 한국교회의 현실속에서 형성된 그의 신학적 실존은 전도및 선교의 신학자였다. 이것은 감리교회 교조인 웨슬리의 후손인 까닭이었을 것이라고 본인은 술회하였다.(크리스챤 신문, 1976.4.10. 2면) 그는 세계와 한국교회의 움직임을 폭넓게 수렴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빌리그래함 전도운동이나 로잔대회(74)등을 W.C.C. 운동과 더불어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한국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한국대회(73), 엑스풀로 74(74), 민족복음화 대성회(77)등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에 와서 전국적으로 하는 복음화운동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계선교의 해인 1975년도에 전개하기 시작한 교단의 5천교회 백만신도운동은 자유주의적 신학의 바탕위에서 발생된 운동이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정신에서 발생된 운동이었고 이 운동속에 W.C.C. 신학도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분규도 감리교회의 자기 본래성인 웨슬리 복음주의 적 정신을 떠나 진보적 복음주의도 아닌 복음적 자유주의 더 나아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넘어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변,홍의)에 까지 나아감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총회로부터 정면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다.(두교수 이단정죄,출교)
현금 신학교의 시위문화는 그대 그시절의 신학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어온 세력들의 열매로 보여진다. 감신 신학의 정체성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 하루아침에 생긴 말이 아니다. 나의 10여년 선배들도 고민하며 목회 현장과 다른 신학임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적당히 타협하거나 목회에 나가선 아예 내 버린 신학으로,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된 채, 신학은 자유 신앙은 보수라 적당히 얼버무렸다.
자유주의 신학 배경의 정치신학과 W.C.C.의 신학을 우선으로 삼고자 하는 일부 교수들의 줄기찬 자유주의적 신학활동과 그 열매들은 한국감리교회의 성장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 주고 있지 못할뿐 아니라 엇박자를 내었다.
한국감리교회및 신학교의 정체성은 "복음주의" 라는 기본어를 빠드릴 수 없고 그것이 관형사로 수식되어지는 비중이 아니라 체언및 결론의 비중이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 감리교회 신학의 정체성을 진보적 복음주의 라 말하는 것은 이해의 여지가 있지만 "---자유주의"라 표현하는 것은 그 신학의 변용이 무한계인듯하여 위험시 한다. 자칫하면 이단설도 훌륭한 신학이라 오판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한 위험성이 "복음적 자유주의"란 표현이 어느덧 변교수의 글(p.1129)과 유교수의 글(p.1144)속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란 말로 변용되었고 홍정수교수의 자신의 신학 변증의 글(포스트 모던 예수 p.41)에도 그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 신학을 변호하였다.(자유주의 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통일교신학을 한때 탁월한 신학이라 평한적이 있었다. -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를 혼합적 동양사상으로 재구성하여서 일까? 그러나 통일교회와 그들의 교리야 말로 기독교의 핵심진리(대속의 속죄교리)를 변용하고 그리스도를 실패자로 묘사하며 문선명씨가 그 실패를 만회하러온 재림주라는 것으로 기독교의 대이단임을 밝혔고 (신사훈) 기독교회는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 신학은 복음주의신학의 기반위에 서서 여러 신학의 장점을 수렴하는 하는 것이어야 한다. 토착화 신학이나 정치, 경제 문화 에 참여도 복음주의 신학의 바탕위에서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감리교회 신학의 정체성은 본래 보수적 복음주의 였고 한때 진보적 복음주의 였으나 이제는 점차 웨슬리적 복음주의 또는 열린 복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여 사도적이며 역사적이고 복음적인 신앙과 신학위에 선교의 의지로서 토착적이며 사랑의 사회 참여로서 이웃교단과 협력하는 활동의 우선순위가 올바로 잡혀있는 총체적인 복음주의 방향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윤박사의 토착화 주장을 후배와 제자들이 복음을 넘어 동양종교사상과 혼합시켜 복음의 정체성을 변이시킨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인은 누가 총장이 되듯 성경적 복음을 먼저 찾고 그 복음을 한국의 종교사상에 토착화시킴으로 타종교사상에 빠진 이들까지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신학방향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보며 그것이 한국감리교회의 미래를 밝게 열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신학의식을 떠나 정치적으로 또는 패거리 정신으로 법이나 무슨 인격 문제를 걸어 이사회 활동을 방해하고 감신을 어지럽히고 학교의 정상화를 방해하는 일이야 말로 큰 죄로 본다. 하나님앞에서 법에 안 걸릴 자 있으면 나와 보라. 문제를 일으키는 자신 들도 용서받고 유예 받아 어느 직임을 수행한 이들이 아니었던가? 아포리아- " 판단 중지" 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 공권력을 부정하고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학교의 정상행정을 방해하는 집단 행동을 멈추고, 각기 사욕을 버리고 각기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터와 일감으로 돌아가고 학생들은 겸손히 먼저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배워 자기 변혁에 먼저 힘을 쓰고 그 다음 어른들의 잘못이 보일 때, 폭력적 투쟁이 아니라 먼저 합리적 제안으로 고치는 방안을 채택해 주기 바란다. 감신의 일을 교육부 파송이사들에게 넘겨 문제해결을 하려는 교회의 주권포기와 정체성 파괴의 죄를 짓지않기를 바란다.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신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이사장과 이사들은 (소수 교수들과 그들과 뜻을 같이한 학생들보다)한국 감리교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그 책임을 다하고자 결정을 한것으로 감리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