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마 19:4-8)
관리자
- 1684
- 2017-11-28 21:02:35
예수님은 샴마이 학파나 힐렐 학파의 견해를 좇아 대답하시지 않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창 1:27, 5:2)의 뜻인 결혼의 원리를 내세우신다.
{“여기서 모세 또는 모세의 계명이 모세 또는 모세의 계명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서의 말씀이 성서의 말씀과 대립되는 것’(클로스터만)이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생각이 이차적으로 만들어진 계명과 대립되는 것이다. 원래적인 상태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100).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창세기 1:27(참조: 창 5:2)은 “타락한 역사에 근거한 입법에 반대하여 창조의 시작부터 계시된 인간 실존의 참 본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W. L. Lane).}(막 10:6의 주석).
웨슬리(J. Wesley)는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심으로써 일부다처를 정죄하셨다.”라고 하였다.
계속된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태는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 것이다.
[부모를 떠나서]는 부모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의존해 살던 자녀의 새 가정을 이끌어 나갈 자립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부부의 연합이 부자의 연합보다 더 중요하고 더 굳건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즈(A. Barnes)는 “결혼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이다. 즉, 부자 관계보다 더 다정다감한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만 진정한 부모 공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내에게 합하여]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연합한다는 말은 가장 강력한 종류의 결합을 지시한다. 원래 그 말[프로스콜레테세타이, προσκολληθήσεται]은 ‘아교’ 또는 ‘접착제’에서 파생된 것이고, 아무 것으로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부부의 결합이란 예속이나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조화의 일치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의미한다.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기질과 성격과 사고방식과 재능과 적성과 취미 등이 다른 부부의 강력한 조화의 일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사랑과 이해이다. 이 사랑과 이해는 요구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부가 상대방에 대해 이해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이해가 가능해야 상대방을 조화를 이루어야 할 독립된 인격체로 사랑할 수 있다.
[둘이 한 ‘몸’(사르카, σάρκα: ‘육체’)이 될지니라]는 부부의 성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부의 성행위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의 방편이자 부부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주는, 부부만이 누리는 즐거움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혼 제도(일부일처)의 신성한 의미와 남녀 동등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결혼을 주님과 주님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보다 깊은 영적 연합에 비유하였다(엡 5:22-33).
계속된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태는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둘이 아니요 한 ‘몸’(사룩스, σὰρξ: ‘육체’)이니]는 부부가 연합된 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102)는 “‘성서의 논증이 제시하는 해석을 추가적으로 확증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낙원의 결혼뿐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결혼을 제정한다.’(Billerbeck, I. 803과 Baltensweiler, 50을 참조하라.)라고 한 라삐적 표상이 아마 배후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막 10 :9의 주석).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결혼 제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는 신적 권위가 있는 부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영적‧인격적‧이성적‧도덕적‧성적인 연합을 굳게 다져 나가야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부부간의 연합은 예속이나 획일이 아니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 맺어진 부부를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내가 죽었을 때의 재혼은 문제될 것이 없다. 바울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2-3)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아내에게 주고, 또 아내의 지참금을 돌려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내를 내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반박하는 질문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의 반박하는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마음의 완악함]은 스클레로카르디안(σκληροκαρδίαν)이며, σκληρός(완고한)와 καρδία(마음)의 합성어로서 ‘마음이 굳고, 완고하며, 거칠고, 야비한 것’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칠십인역에서는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해진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참조: 신 10:16, 렘 4:4, 집회서 16:10).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마음 상태 때문에 모세가 마지못해 이혼 계명을 준 것이다. 결단코 모세는 이혼을 정당시하거나 장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시된 인간 사회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바 아내를 내버리는 남편들의 횡포를 막거나, 최소한 줄여 보려고 한 것 같고, 또한 부당하게 이혼당하는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받게 함으로써 재혼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한 것 같다.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05-508.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5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