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열금(十金)

함창석
  • 1243
  • 2017-11-27 19:16:33
十金時代

김영삼은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文民)정부를 출범시켰다. 대한민국 국회 9선의원이었으며,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1995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연합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하였다.

김대중은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6ㆍ25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공고화하였다. 민족주의자들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서도 국내파ㆍ연안파ㆍ소련파ㆍ갑산파 등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권력을 독점해왔다. 그래서 북한 사회에 1인 숭배에 기초한 매우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여 매우 기형적이고 봉건적인 유사-왕조체제를 만들었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을 승계하였다.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 강행과 1999년과 2002년의 1·2차 연평해전, 2010년의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17년 동안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등의 공식 직함을 가진 북한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다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아들 김정은에게 3대 권력 세습을 하였다.

김수환은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되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민주화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평화를 위한 기도》(1981),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등이 있다.

김종필은 19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본의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회담, 대일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 문제 등에 대해 타협점을 찾고 메모를 교환함으로써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1971년 6월~1975년 12월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과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로 3당 합당을 하였다. 보국(保國)·근정(勤政)·수교(修交) 훈장, 미국 동성훈장, 중국 대수보훈장 등을 받았다.

김정은은 2009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았으며, 다음날 열린 제3차 노동자 대표자회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정치국 위원에 선임됨으로써 후계 구도를 굳혔다. 부위원장직은 김정은을 위하여 신설된 자리였다. 2011년 12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권력을 승계하였다. 맹방인 중국과 러시아도 그의 지도 체제를 공식 인정함으로써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이 공식화되었다.

김홍도는 개신교목사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이다. 교회헌금관련 재판 실형과 많은 실언으로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발언이나, 정치적 성향을 신도들에게 주입시키는 내용들이 물의를 빚었다. 현재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동사목사로 사역 중이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역임했으며, 세계교회 갱보협회 이사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장, 한미 기독교 목회자협의회 회장도 겸직하고 있다.

김삼환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소속으로 1980년 세운 명성교회의 당회장목사로 있다가 2017년 11월 원로목사로추대되었다. 명성교회와 김삼환 원로 목사는 비자금 관련 내용을 보도한 기자, 언론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 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삼환 원로목사와 자살한 박모 재정장로 외의 인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차명 계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해당 계좌는 12년간 800억원이 적립된 것으로 확인됐다. 2017년 아들인 김하나목사에게 명성교회를 세습시켰다.

김여일은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로 아들이 몽골단기선교 중 교회 지붕 전기공사 사고로 순교함으로써 조영희 사모와 뜻한 바가 있어 송천교회에서 65세로 자원은퇴하고 몽골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 어린양교회 김종진 선교사를 파송하고 10여년간 몽골감리교신학교 학장과 아르바르헤이로 영원한구원의 별교회지원, 오직진리교회 등 개척 선교와 2016년 종아일교회 백낙현선교사, 원주봉산교회 함창석 장로와 협력하여 날래흐 산돌교회를 창립하는 등 선교에 최선을 다한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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