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의 등화는 꺼져버렸다

이주익
  • 2556
  • 2018-02-02 02:14:38
나라와 민족의 운명(運命)이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놓였다.”

1907년 5월 탁사 최병헌 목사가 종로2가 YMCA 강당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후 이 땅에서는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친일 내각이 들어서고, 일성 이준이 헤이그에서 분사하고(7월 14일) 이 일로 고종 황제의 폐위, 외교권 박탈과(7월 24일) 군대의 해산(8월 1일), 그 해 말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왕세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일본으로 볼모 되어 가고, YMCA 설립자 헐버트가 추방된다. 6개월 이내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로써 풍전의 등화는 꺼져버렸다.

최병헌 목사의 이 예언은 2년 전인 1905년에 처음 있었다. 을사년 보호조약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동포들의 결사항전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난다. 그 시발점은 배재학당 영어 교사 출신의 당시 주 영국 서리공사 이한응(李漢應)의 분사(憤死)였다.

1905년 11월 17일 본국에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공사관이 강제 철수 당하게 되자, 이한응은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을 길 없어 귀국을 단념하고 임지에서 음독 자결하게 된다. 이 공사의 비장한 최후가 본국에 알려지자 뒤이어 민영환(11월 30일), 조병세가 의분 자결했고, 원임 총리대신으로 만백성이 따랐던 박정양 대감 또한 12월 15일, 의분의 상소를 남기고 죽음으로 항일 애국운동은 이 나라 산천을 뒤덮게 된다.

이 항일 애국운동의 불씨는 탁사 최병헌 목사 주관으로 12월 4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이한응 공 추모예배였다. 이 예배에서 탁사 최병헌 목사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다고 했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왜구의 텃밭이 되었다고 일괄했다.

이날 예배 후 최재학, 이준, 김구를 소주(疏主)로 한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와 함께 반대 시위대가 남대문과 종로통을 메우게 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애국항일운동 중 가장 큰 항쟁은 1907년 8월 15일 충북 제천에서 일어난 의병 항쟁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 보도한 영국 데일리 뉴스(London Daily Mail) 멕켄지 기자의 보도 내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1월 17일(약력 1896.1.1)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선비 600여명이 제천 장(長) 마을로 모여 밀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후 많은 선비들이 전국에서 모여 들면서 항일 의병으로 집단화 되었다. 이 일대는 그 후 반년이상(1896.6.30) 해방구로 존재했다. 당시 일본에 영합했던 부근 3관찰사와 6명의 군수가 처단 대상으로 공시되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고 무력 사용처를 넘보고 있던 일본군에게 이 소식은 호재였다.

1907년 8월 15일, 미안(未安) 중위가 이끄는 일개 소대병력이 탐색 차 제천에 갔다가 그날 밤 의병 350여 명과 교전 4시간 만에 포위망을 뚫고 곤욕 끝에 충주로 퇴각했습니다. 1907년 8월 23일, 일본군의 응징적 토벌작전이 아다찌 부대에 의해 감행되었다.“(1개 대대 혹은 연대 규모)

일본군은 인구 2~3천 명인 제천 읍내의 민가를 송두리 채 불살라버리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묻혀 질 뻔 했던 이 사건은 영국 데일 메일리 멕켄지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도 않은 초가을 어느 날 제천에 발을 디딘 순간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멀리 일장기가 선명하게 나부끼는 것이 보였고 일본군 초병의 총검 또한 번뜩이고 있었다. 잿더미로 변한 산위를 걸어서 마을로 들어갔다. 나는 이렇게 완전히 파괴된 곳을 일찍 본적이 없다. 검은 잿더미와 타다 남은 나무들로 적막해진 작은 산들만이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제천은 지구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신문 보도기사의 제목은 조선의 비극, 폐허로 변한 제천(堤川)으로 중요한 현지 취재 보고서와 함께 폐허가 된 제천의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있는 사진 3매가 곁들여 있었다. 사진 속의 장소는 현재의 제천 의림지 부근이다.(위 내용은 일본의 사학자 가미야가 영국 런던에서 찾아낸 자료를 토대로 제천 현지를 다녀온 후 작성된 기사임)

탁사 최병헌 목사와 연관된 또 다른 사건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헤이그 밀사사건(1907년 7월)과 신민회 105인 사건이다. 역사가 최남선은 헤이그 밀사사건은 이준 등이 상동교회(전덕기 목사)와 종로 청년회관(월남 이상재)에서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민회는 1907년 도산 안창호가 귀국, 상동교회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단체이다.

이 시기에 추정 이갑 선생과 백암 박은식 선생은 북촌사직을 중심으로 서우학회와 서북학회를 결성, 1907년 한국 최초의 대학인 서우사범학교와 서북협성학교를 건립하게 된다.

이 학교는 현재의 낙원동 옛 건국대학에 터를 잡았으며 연건평 600평의 3층 대학건물을 한국 최초로 설립하기도 했다. 서북 협성대학교 본관 건물 건축과 같은 시기인 1907년 기독교 쪽에서는 종로 청년회관 건축을 착공했다. 1907년 5월 15일 착공 1908년 12월 3일 준공된 이 건물 또한 3층 건물로 연 600평이었다. 이 두 건물은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태에서 가려진 희망의 불길을 당긴 것이 종로에서의 청년운동과 경운동에서의 민족대학 건립이었다. 그러나 1907년은 우리 민족역사상 최악의 해로 일제에 의해 국왕이 폐위되고 일본 총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며 왕세자는 불모로 일본으로 가게 된다.

또한 사직을 떠받던 선비 800여 명을 비롯한 3,000명 이상이 제천에서 일제의 무자비한 방화, 포격, 총살로 죽게 되고 의식 있는 민족지도자 600여 명이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체포,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암담한 시기에 일어난 일대 사건이 평양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심령 대부흥운동이다. 또한 감리교회 하디 선교사에 의해 원산에서 일어났던 연합심령 부흥운동이 평양으로 번져 전국적인 대 부흥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우리 민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과 절망 속에서, 1909년 9월 한국 감리교회(남감리회)가 부르짖고 나서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란 표어를 함께 외치며 민족의 명운(命運)을 구령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구령 운동의 중심은 천국복음. 즉 뜻을 하늘나라에 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 YMCA가 있었다. YMCA 간사로 설교가 브로크만(F.M Brockman) 과 그레그(G.A Gregg)가 내한, YMCA 회관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 집회를 인도한 바 1906년~1907년, 전반기 46회 전도 집회에 18,443명이 참석했고, 대중 종교집회 43회에는 매해 평균 1,611명 연인원 69,273명이 참석했다고 YMCA 통계는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07년 2월 9일 세계기독학생연맹 총무 모트(J. R. Mott) 박사 내한 강연회에는 엄동설한 임에도 불구하고 6,000여 명이 모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국왕이 그를 왕궁으로 초대하여 YMCA운동의 필요성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그가 한 강연 내용은 한국에서는 지금 영적 부흥운동이 불붙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 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선교 사상 완전하게 복음화 된 유일한 비기독교 국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한국을 살리는 길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라고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이 여파로 세계기도 주간 때에는 3,0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성령운동의 중심에 애국독립운동이 있었던 그 배후에 있던 분이 탁사 최병헌 목사이다.

다음 해인 1908년은 융희 원년이다. 고종 황제의 폐위에 이어 순종 황제가 즉위한 첫 해이다. 당시 장안의 화제는 탁사 최병헌 목사의 융희 강연회”(장학사 연설)이다. 종로(YMCA)에서 있었던 이 대중 종교 강연회에는 수많은 청중이 운집했고 연일 계속된 강연회의 연설 내용은 당시 2개 일간 신문인 황성신문과 매일신문에 전면 게재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보면 종로 YMCA 회관은 건축 중에 있었던 바 이 앞에 있었던 장학사에서 강연회는 행해졌고 청중들은 종로 거리와 현재의 이 YMCA 건물 일대에 청중이 모여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강연회의 백미(白眉)가 충정공 민영환의 순절이야 말로 의로운 죽음의 실천자요, 땅에서 난 불세의 영웅이라는 강연이다. 죽음으로 인하여 삶이 있다”(因死有生)는 제목으로 행해진 당시의 강연 내용은 탁사 최병헌 목사 강연집(몽양원 38-43면)에 수록되어 있다.

탁사의 공개 강연에는 청년학도는 물론 친일 고관대작도 참석했다. 탁사의 강연은 애국청년지사들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형성하게 되는데 일제에 의해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 후일 삼일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태동의 모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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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익 목사(서대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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