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의 지혜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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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7 21:11:26

  1. 시작하는 말


어리석은 지성인이 많습니다. 지성인인 통치자나 고위 관료나, 국회의원,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 박사나 스승이나 과학자가 불법이나 죄악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헬라의 네 가지 덕은 용기와 지혜, 정의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용기와 정의와 절제는 지혜가 없으면 부덕이나 악덕이 되기도 합니다. 한 겨레를 수백만, 수천만 명을 학살한 공산 독재자들의 명령을 복종한 군인의 용기는 악덕입니다. 정의 때문에 불의와 정죄와 편 가름과 숙청과 학살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감성이 폭발해야 할 때의 절제나 사랑의 절제는 부덕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 보다 더 값진 것, 보다 더 먼저 할 일 등 ‘보다 더’를 분별하여 행하는 지혜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필요한 미덕입니다.

  1. 나아만의 나병과 지혜


나아만은 아람 곧 시리아의 큰 용사로서 구국의 공을 세운 군대 장관이었는데 불행히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명성도 나병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최고 통치권자인 임금의 총애도 나아만 장관의 나병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기 짝이 없는 나아만이었지만, 그에게도 행복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요소들은 불행한 처지를 견뎌 나가게 하고, 불행을 극복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나병이라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바로 만남의 복이었습니다.

첫째, 나아만의 만남의 복은 어린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이스라엘 소녀인데, 포로로 끌려와서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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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종이 그 주모에게 주인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계신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계시면 나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나아만의 나병이 낫지 않아 거짓말이 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면서, 게다가 불치병인 것을 알면서 그렇게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신분은 여종이나 믿음은 왕 같은 소녀였습니다.

여러분의 만남의 복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 친척이나 동료나 이웃에게 만남의 복이 되고 있습니까?

둘째, 나환자인 나아만의 만남의 복은 아람 왕이었습니다. 아람 왕은 과거에 큰 공을 세웠지만, 현재는 나환자인 나아만을 위해서 이스라엘 왕에게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 게다가 친서까지 들려 보내 주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왕인가는, 구국의 공신인 다윗을 시기하여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기를 쓰며 추격한 사울 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윗사람, 특히 아랫사람들이나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만남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나환자인 나아만의 만남의 복은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사 선지자이었습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집 문에 섰을 때,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직접 나가 마중하는 것이 예의인 줄 알면서도, 사람을 보내는 결례를 범한 것은 우상 숭배자인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사자의 권위를 깨우치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인간적인 생각과 예절을 따르는 대신에, 하나님의 사람답게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넷째, 나아만의 만남의 복은 수행한 종들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직접 마중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생각했다가, 엉뚱한 사람이 와서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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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들은 나아만이 몹시 화가 나서 떠났습니다. 자칫하면 이스라엘에 오기까지의 모든 수고와 고통과 만남의 복들이 헛것이 되고,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를 상황이 되었을 때, 수행한 종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극구 만류했습니다. 대접받거나 자존심을 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큰 일을 시켜도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순종할 판인데,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는 것이 뭐가 힘드냐는 겁니다. 나아만이 듣고 보니 구구절절이 옳은 말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이었지만, 그대로 따라서 기적의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범사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방식대로 되어야 하나님을 인정하는 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3:6을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계집종과 아람 왕과 수행한 종들이 나아만에게 만남의 복이 된 것은 평소에 나아만이 왕에게 충성했고, 종들에게까지 선대하며 은혜를 베풀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은혜를 베풀 줄 안다는 점에서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완쾌된 후에 보은하기 위해 모든 수행원들을 데리고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 도로 왔다는 점에서 보은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은혜도 알고 보은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깨닫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할 줄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머리가 꽉 막히고, 마음이 닫힌 오만한 지도자들과 달리, 머리와 마음이 열려 있고, 좌우파의 말은 물론, 아랫사람, 그것도 어린 여종의 말까지도 잘 듣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지시가 훌륭한 종교 지도자의 지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레와 날씨의 신인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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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등의 우상을 숭배하는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나아만은 고국에 돌아가면, 암몬 왕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 예배할 때마다 수행하며 몸을 굽혀야 하는데, 그 부득이한 행동에 대해서까지 하나님의 용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오래 믿었어도 마음놓고 예배에 빠지는 교인들도 있고,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빠지는 교인들도 있고, ‘빠질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면서 빠지는 교인들도 있는 것을 보면, 나아만의 깨달음과 결심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기적의 치유가 다른 사람이 아닌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이뤄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예물을 받아 달라고 거듭 강권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게도 통치자들과 가족들과 측근들이 받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원인인 뇌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보은의 예물입니다. 주님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고,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선지자들도 감사의 예물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6:7 이하를 보면, 주 예수님도 여인의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기꺼이 받으시고,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인의 행한 일을 말하여 여인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받아도 상관없지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리켜 맹세까지 하면서 나아만의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의 나아만에게 치유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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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유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가 그의 나라의 우상들과 그 사자인 사제들과 다른 것을 확고히 인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예물보다 훨씬 더 값진 보은의 예물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에게 은혜 받은 사람이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값진 예물이 어디 있으며, 은혜 받은 교인이 깨닫고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것보다 더 흐뭇한 예물이 어디 있습니까?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않습니까?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운명, 더 나아가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지 않습니까? 시편 49:20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결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로만 은혜를 아는 사람들도 있고, 머리로만 깨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고 깨달은 것을 실행하겠다고 결심만 하고 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아만은 은혜를 알고, 진리를 깨달은 대로 결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알면서도, 은혜를 베풀거나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은 것을 깨닫거나, 유익한 것을 깨닫거나, 중요한 것을 깨닫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1. 맺음말


나환자인 나아만은 잠시 인간적이며 감정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때마다 지혜로 행하여 결국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답게 좌우파를 안 가리고 남들, 특히 믿는 사람들의 말을 잘 들었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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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할 줄 알았습니다. 보다 더 먼저 할 일과 중요한 것과 값진 것 등을 분별하는 지혜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필요한 미덕입니다. 지혜의 행위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사람들에게 만남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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