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그리운 내 사람아!

관리자
  • 1439
  • 2018-02-27 02:01:48
한 장로님께서 돌아가신 목사님을 그리워 하며 사목가를 부르고 계심을 본다.
그런데 그 사목가에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감독회장 선거제도와 감리교회를 향한 원망으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참으로 너무도 안타깝기만 하다.

만약 그 장로님의 주장하심처럼 선거제도가 그 목사님을 죽게 하였다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아니 아주 없애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장로님의 주장과 같이 감리교회가 그 목사님을 죽게 하였다면 감리교회는 감독회장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그 분의 영정 앞이라도 사죄를 드려야 하며 스스로 감리교회를 해산시켜도 마땅하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장로님의 사목가가 돌아가신 분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화풀이며 그 화풀이의 방향조차도 틀렸다는 것을 말이다. 감리교회의 선거제도와 감리교회가 그 목사님을 죽게 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목가의 화풀이가 진정 옳다면 그 대상은 감리교회와 선거제도가 아니라 그 목사님을 감독회장 선거장으로 이끌어낸 그 누군가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겐 세속적인 정치색체가 너무도 강했을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을 말한다면 정치꾼 목사들의 무책임한 부축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원망의 화풀이가 옳다면 감독회장 선거에 자신의 전재산을 탕진해가며 입후보를 했던 그 목사님에게 그 원망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해야 마땅 할 것이다.

물론 감독회장 선거에 들어가는 돈이 너무 크다는 지적은 사실인 것이다.
입후보하는 데 들어가는 경비와 선거를 치루는데 있어 사용되는 돈이 너무도 많은 액수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큰 돈이 없으면 입후보조차 할 수 없는 현 선거제도엔 문제가 있다.
결국 돈있는 자만이 감독회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돈이 없으면 감리교회를 위해 일한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 선거제도는 돈잔치이다.
그렇다고 교회 선거제도가 돈잔치여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여할을 감당하는 교회라면 세상 선거제도보다 더 청렴해야 한다.

돈을 아주 쓰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돈잔치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돈잔치는 맘몬의 잔치이다. 맘몬의 잔치는 우상숭배의 잔치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음란한 잔치를 행하였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맘몬 숭배적 음란 행위와 같은 선거제도는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맘몬 숭배적 음란행위에 대하여 '아니라' 할 수 있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감리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 아니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 또한 돈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감리교회는 돈으로 감독회장을 세우고 감독을 세우는가?

현재 감리교회는 성경과 많이 달라져 있다.
세상의 정치와 감리교회의 정치가 전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세상정치만도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 감리교회 정치의 모습이리라.
현재 감리교회는 성경적이지 못하며 교리와 장정대로 치리되어지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고 현 선거제도에 대하여 장로님의 주장과 같이 제비뽑기를 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장로님의 사목가가 있었던 것과 같이 내게도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이 땅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한 젊은 목사의 죽음이 있었다. 그 친구 목사가 때때로 그립지만 더 이상 그 친구를 만날 수는 없다.

그 친구 목사는 일찍 감리교회 내에 존재하는 정치 세력에 줄을 서 있었다.
그래서 인지 그 친구는 같은 동기들 보다 사역지의 옮김이 여유로왔다.
그렇다 하여 그 당시 사역지의 옮김이 아무리 좋았다 할지라도 조금 더 나았을 뿐 엄청난 차이도 아니었다.
한 때 나도 그 친구의 그런 여유가 좋아 보였고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친구에 대하여 내게 들리는 소문들은 좋은 소문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목사로써는 해서는 안되는 불미스러운 이야기만이 소문으로 돌고 돌아 내귀에 들렸었다.
그 친구 목사가 그리 된 것이 안타까왔지만 당시 그 친구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고
'니가 아무리 아니라 그래도 너도 이미 줄에 서있는 것이다.'고 하며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 줄 섬이 목회자들 관계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인맥정도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인맥이 아니라 또 다른 파벌로 해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감게에 글을 쓰던 때를 되돌아 보면 무조건 적인 줄세우기, 무조건적인 패 정하기, 무조건적인 대적과 무시와 조롱이 있었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감독회장의 문제를 사회법으로 이끌어간 것을 질타하였더니 무시와 조롱을 당해야만 했다.
일단 총회에서 김국도 목사님이 감독회장으로 당선되었으니 인정하고 장정에 따라 다음 수순으로 시비를 가려야 할 것이라 했더니 '김국도 목사의 똘마니냐?', '누구에게 돈을 받고 글을 쓰는 것이냐?','누구의 개가 되어 짖고 있는 것이냐?'는 식의 비아냥과 조롱을 받아야만 했었다.

감게 역시 나도 모르는 패 나눔이 있었고 나도 모르는 줄이 세워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목원 출신이기 때문에 김국도 목사님을 편든 것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눈엔 그리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만큼 감리교회안에 파당과 나뉨이 동문과 연줄 등에 의해 갈라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로님의 사목가를 읽으며 또 다시 그 친구의 죽음이 왠지 다르지 않음처럼 보여진다.
과연 감리교회가 그 친구를 죽게 하였을까? 과연 감리교회안에 존재하는 학연이 그를 죽이게 한 것일까?
얼핏 보면 그리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누가 강제로 그 패에 들라 한 것도 아니며 누구에 의해 억지로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일뿐이다.

거기에 아직 덜 성숙해진 감리교회의 파당정치가 그 친구의 선택에 도움을 주었을 지는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그 친구와 함께 했었던 그 윗분들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죽음으로 토사구팽시킨 윗선에 계신 그 분들을 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설령 그리 했다 할지라도 어찌하랴 다큰 성인이 된 목사 스스로 그 길을 택하여 걸어 갔으니 말이다.

누가 가룟유다를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책임은 가룟인 유다 자신에게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가룟인 유다는 그 책임을 감례하기 위하여 가지 말아야 할 그 길을 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 친구가 그립다.
그래도 그 친구 목사가 가까이 있어서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위로도 받았었다.

4분55초의 여유를 갖고 장로님의 글과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를 생각하여 이 노래를 들어본다.


사랑아~ 그리운 사람아!
소향은 스스로 자신에게 낙인이 찍혔던 '개독교인 소향'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을 벗겨야만 했다. 교회는 그 편견과 선입견을 덜어주지 못했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얼마나 많은 목사들의 타락과 교회의 분란과 다툼이 보이는가? 우리 스스로 이젠 개독교인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찍힌 개독교인이라는 낙인을 지워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세대엔 목사로 먹고 사는 덴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다음 세대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라도 감리교회를 떠냐야만 할지도 모른다.

사랑아~ 그리운 사람아!
소향이 선입견과 편견을 깨트릴 수 있었던 것은 소향만이 갖고 있었던 달란트이자 뛰어난 실력이었다. 만약 그러한 독보적인 실력이 없었다면 소향도 그 편견과 선입견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CCM가수인 소향은 이미 대중가요의 주류세력을 이루고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기성가수들로부터 물매를 맞고 퇴출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성가수들이 다 잘못한 것일까? 그렇지도 않았다. 속 마음을 어찌 됐던지 대놓고 소향을 비난하거나 무시와 조롱을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감리교회 주류이자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기성목회자들의 태도와 비교를 해본다면 놀란만한 대응이었고 공명정대함이었다 생각을 한다. 그런면에선 가수들이 목사들보다 더 나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왜 소향을 무너트리고 싶었던 시샘 많은 가수들이 없었겠는가?
그들을 향해 나를 인정해 달라 호소하는 것도 필요하겠으나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통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소향은 그 길을 걸었으며 결국 많은 기성가수들로부터 자신의 실력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대중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이런 가수는 없다.'는 평가를 들었다. '또 유엔이 선정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고음의 가수'라는 칭찬도 듣게 되었다.

사랑아~ 그리운 사람아!!
오늘우리 감리교 목회자들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세상은 넓고 큰 교회와 잘난 목사는 많지만 이런 목사는 없다.'는 평을 우리 감리교회 목사가 들어야 한다. '세상이 인정하야 할 가장 성경적이고 아름다운 기독교인 감리교회'란 평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감리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결국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4분30초의 여유를 갖고 자신의 실력을 갖고 세상의 모든 편견과 선입견앞에 당당했던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자.


사랑아~ 그리운 사람아!!!
소향의 음색은 맑고 깨끗하여 락음악엔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향은 스스로 자신의 실력만으로 이러한 편견도 깨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켜 주었으며 인정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었던 것은 소향 자신의 음색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과하다는 평을 받았던 고음에 대한 자신감으로 경연에 있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다소 락이란 음악 장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색을 갖고 있었던 소향의 노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하리라.
우리의 정체성을 잃으면 우리 감리교회의 존재는 제 아무리 존재한다 하여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을 향하여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다.'는 표현을 하셨다. 현재 우리 감리교회가 장정을 무시하고 장정대로 치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교회가 되고 만 것이며, 온통 죽은자들의 파티장으로 변하고만 것이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선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리교회가 어떤 교회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넓고 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런 교회(단)는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랑아~그리운 사람아!!!!
목회의 형장에 와보니 많은 목회자들이 참으로 분주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경우엔 지나치리 만큼 이리저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힘든 목회로 잘 해보겠다는 욕심만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다. 집회에 참여하거나 쎄미나에 참석을 하는 등 그 모습은 내겐 과열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타 교단들과의 차이점도 그리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교리를 논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현장은 수많은 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평준화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회 안에 흰돌산 기도원의 윤석전목사의 그림자를 찾아보기는 쉽다. 여의도 중앙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의 흔적도 찾아 볼수 있다. 어쩌면 장경동 목사의 흔적도 보이며 원치만니의 모습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기복적이며 이단적인 모습도 찾아보기가 쉬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감리교인 다운 목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타교단과 비교하여 감리교인다운 목회자의 모습을 찾아 본다면 너무도 정치적인 목사로 변질되어 있는 모습들 뿐이다. 정치적인 목회자와 장로들의 모습은 타교단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본다.(감리교회의 유일한 영향)

웨슬리는 정치목사가 아닌데... 감리교 목사들은 너무도 정치적이다.
웨슬리 목사는 장로교와도 다른데... 감리교 목사들과 장로들은 장로교적이다.
웨슬리 목사는 기복적인 복음을 전하지 않았는데... 감리교 목사들에겐 기복적인 설교가 넘쳐난다.
웨슬리 목사는 신비주의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감리교 목사들에겐 신비주의적인 모습도 쉽게 찾아 볼수 있다.
웨슬리 목사는 모라비안 교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었지만 그들과 한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감리교회 안엔 이단과 같은 모습을 너무도 쉽게 찾아볼수 있으며 우상숭배와 맘몬숭배 또한 쉽게 찾아 볼수 있다.
웨슬리는 영적인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적인 순결을 지키려 했던 규칙쟁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감리교회 안에 육체적인 간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간음(장정 무시)의 모습도 너무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감리교의 시작인 웨슬리의 모습은 찾아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쉽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감리교회의 정체성 혼란이며 또 다른 타락이자 음행인것이다.

소향에 의해 세속적인 락음악을 CCM처럼 바꿔 놓았다면 우리 감리교회 또한 장로교를 감리교회처럼 바꿔놓아야 한다.

침례교도, 순복음도, 성결교도, 더불어 신천지나 구원파들이나 또 다른 이단들 조차도 정치적인 것만 아닌 감리교회처럼 바꿔 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소향과 같은 사람이 감리교회 안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다윗과 같은 목사가 필요하고 야곱과 같은 목사도 필요하며 이삭과 아브라함과 같은 목회자들도 필요한 것이며
선지자들과 같은 목사들이 필요하다.

세상에 거하며 세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감리교회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감리교회의 장점을 살려 그 장점으로 다른 교회들을 변화시켜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고 소금이 되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사랑아~ 그리운 내 사람아!!!!!!
주님은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 감리교회를 향하여 이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언제까지 방황하고 언제까지 딴 길로 가며 언제까지 기독교인이 아닌 개독교인으로 살것인지 안타까움의 노래를 부르고 계신 것이다. 이제라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

한 사람만이라도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만 있다면 감리교회는 변화될 것이다.
그러면 제2, 제3의 감리교 운동이 일어날 것이며 웨슬리의 후예들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운 내 주님이시여!!!!!!!
소향은 하혈증이 있던 여인과 같이 주님의 옷자락이도 만지려는 간절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 감리교인들도 주님을 향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심령으로 울부짖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오늘도 하나님은 욥과 같은 순전한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킴으로써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있는 진정한 믿음의 실력을 겸비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진주는 제 아무리 진흙속에 뭍혀 있다 하여도 그 빛(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울부짖는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은 믿음의 사람, 그래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값진 진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태복음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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