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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성전 숙청
관리자
- 1591
- 2018-03-20 19:42:47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11:15-19과 누가복음 19:45-48과 요한복음 2:13-17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공생애의 초기의 기사이므로 다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는 이 기사를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로 시작한다.
“성전”은 히에로(ἱερῷ)이며, 성전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작업이 계속되어 주후 64년에 완공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더욱 자세한 설명은 저자의 마가복음 11:15의 주석을 보라).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지만, 성전 안에는 교권자들과 종사자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셔서 숙청하신 것이다.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의 상인들은 {안나스와 대제사장들의 가족에게 고용되었거나(W. Barclay, D. W. Burdick) 결탁된(E. Bickersteth, W. Hendriksen)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물과 제물에 필요한 술, 기름, 소금 향 등을 순례자들에게 팔았다. 그런데 그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성전 경내에서의 판매권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지불했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폭리를 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사장들과 상인들의 부당한 이윤 추구의 대상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순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실은, 순례자들이 임의로 제물로 쓸 동물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도중에 병들거나 죽거나 하여 몹시 불편하고 힘들었으며, 또한 검열에 합격하기도 무척 어려웠다.
“본래는 성전 경내의 일부로 고려된 감람산에 순전한 제물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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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네 군데의 시장이 대제사장이 아닌 공회의 권한 아래 있었다.…30년경에는 제도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가야바의 허가장을 갖고 경내에서 제물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W. L. Lane).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부당한 이윤 추구의 속된 시장으로 전락되어 버렸던 것이다. 더욱이, 끌고 온 짐승(레 17:1-6, 렘 17:26)이 검열관에게서 불합격 판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성전에서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막 11:15의 주석.)
이제 기도의 준비 장소였던 이방인의 뜰은 소란과 동물들의 울음소리, 불결, 악취 등이 뒤섞여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신 예수께서 격분하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이 바치게 되어 있는 반 세겔의 성전세(출 30:13-15. 참조: 마 17:24-27)를 옛 히브리나 두로의 돈으로만 받았으므로(F. C. Grant, E. Schweizer), 헬라, 로마, 애굽, 기타 나라에서 통용하는 돈을 가지고 있는 순례자들을 위해 환전상들이 있었다. 환전상들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교포들을 상대로 얼마든지 바가지 씌울 수 있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의 제물이며, 여인의 정결을 위해(레 12:6, 눅 2:22-24), 문둥병이 깨끗해졌을 때(레 14:22), 그 외의 목적을 위해(레 3:14, 29) 사용되는 제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난한 자를 위한 제물로 정해 주신 비둘기조차도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폭리 거리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성전 밖에서는 9펜스밖에 안 되는 비둘기 한 쌍이, 성전 안에서는 15실링을 지불해야 했다.”라고 하였다. 또한, 탈무드에 랍비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이 성전 안에서는 비둘기 한 쌍의 값이 금화 한 개의 값어치에 해당하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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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은화 한 개의 값으로 내려야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사가 있다.
성전을 폭리와 사취와 착취의 장소로 바꾸어 버린 자들, 즉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렬한 행동은 성격상 개혁이나 직접적인 혁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E. Schweizer, W. L. Lane). “예수님의 행동, 즉 비누하스가 자신의 열심에 의해 호소했던 적극적인 경건주의의 흐름 속에서(민 25:6-12, 시 106:28-31, 집회의 서 45:23-, I Macc. 2:54), 혹은 자기 성전에 오시는 주로서 정결케 하신 행동은 심판에 대한 직접적 전조(말 3:1-5)로 설명될 수 있다”(W. L. Lane). 그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여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M. Henry). 그러므로 그 행동은 내용이 상실되고, 형식주의와 종교적 위선으로 변질된 옛 종교(유대교)에 대한 상징적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시아적 영적 권위의 발로로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혀 새로운 성전의 건설을 상징하는 행위인 것이다”(E. Schweizer).}(막 11:15의 주석).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랍비들처럼 성서적 정당성을 부여하셨다. 이 사실에 대해, 마태는 【13】“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분노나 책망 등을 비롯한 모든 언행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인 구약성경)을 사람들에게 일깨우시는 것에 집중되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6:7 후반(LXX)의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니라”를 인용한 것이고,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는 예레미야 7:11 전반(LXX)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를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으로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성전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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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허용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마가는 “만민”(막 11:17)이라는 말까지 인용함으로써 보다 깊은 신학적 식견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누가는 단순하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는 유대인들이 순례자들을 상대로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짓과 그런 장사 터로 삼음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할 이방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그 상인들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교권자들을 향한 혹독한 책망이다.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50-553.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