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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관(마태복음 22:23-33)
최세창
- 1192
- 2018-04-07 00:36:37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를 기록한 마태는, 이번에는 부활 문제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2:18-27과 누가복음 20:27-40에도 기록되어 있으나① 서로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기사는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로 시작된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의 “사두개인들”은 3:7의 주석을 보라.
사두개인들의 조롱조의 질문에 대해, 마태는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생님”(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은 {“권위의 의미를 대표하며 강조하는 것이다”(G. Poteat).}(약 3:1의 주석). 이 말에 대해 파커(P. Parker)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용어(master)는 그리스 문학에 종종 나타나는데, 존경의 칭호로서 ‘주’와 ‘왕’이란 말과 쌍을 이룬다. 신약성경에서는 가끔 세례 요한과 같은 비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거나(눅 3:12), 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눅 2:46, 요 3:10)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 용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외에 거의 공적 지위란 암시로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②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중 하나인 신명기 25:5-10에 나오는 수혼법(嫂婚法)을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수혼법이란, 만일 아내가 아들을 낳기 전에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형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가까운 친척(참조: 룻 4:1-8)―가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낳은 장자는 죽은 남편의 아들로 간주되어 그의 혈통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혼을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권고 사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혼법이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계명을 거역할 경우에는 수치를 당하였다.
아무튼, 그런 결혼 형태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다는 것이 창세기 38:8과 룻기 4:1-12에 의해 확증된다.
수혼법을 내세워 예수님께 도전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마태는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하였다.
{산너(A. E. Sanner)는 “이 어려운 문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때에 상투적으로 쓰는 것인데,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불합리성을 나타내려는 데 본의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일곱이란 숫자는 “이야기를 보다 흥미 있게 만들고, 부활 신앙을 더욱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다”(W. Hendriksen). 또한, 이 숫자는 일곱 남편을 사별한 라구엘의 딸 사라를 간접적으로 상기시킨다(토빗서 3:8, 6:14. 참조: 사 4:1).}(막 12:20-23의 주석).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는 예수님을 당황하게 만들고, 부활의 모순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즉, 모세가 부활을 사실로 믿었다면 수혼법을 주었을 리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리새인들이 같은 질문을 들었다면, 첫 남편의 아내가 된다고 했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태는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구약성경(율법)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전자는 32절을 가리키는 것이고(참조: 단 12:2, 사 26:19), 후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되었다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속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태는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때에는 인류의 멸절을 방지하는 결혼은 필요가 없다. 이것은 부활 때의 인간의 존재와 생활양식 그리고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부활의 몸은 썩어질 혈과 육으로 구성된 것(고전 15:50)이 아니라,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4, 요 3:5).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후의 생활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물론, 부활한 존재의 삶의 자리는 물질세계인 현세가 아니라, 영적 세계인 내세이다(계 21:1, 요 14:2, 18:36).③
이어서 예수님은 부활한 의인들에 대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1:20의 주석을 보라.)과 같으니라”라고 하셨다.
{黑崎幸吉은 “부활한 후의 상태는 천사들과 같이 탐욕도 색욕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는 영체(신령한 몸)의 존재뿐이다. 남편과 아내와는 서로 알아볼 수는 있으나, 이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고, 다른 이는 배척하려는 그러한 생각은 이미 없고, 모두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써 그러한 상태로 사람을 부활시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켈스테트(E. Bickersth)는 “부활 후의 복받은 자들은 천사들처럼 순결하고, 행복과 영광으로 특징이 되는 불멸의 영생을 지닌다.”라고 하였다.
미래의 세계에서 부활한 자들이 천사와 같다는 사상은 묵시문학의 사상과 일치한다. 즉, 부활한 자들은 저 세상의 높은 데 거하며, 천사들과 같고(에티오피아 에녹서 51:4. cf. 104:4, 시리아의 바룩서 1:9-), 별들과 같다는 것이다(sBar 51, 10. 참조: 에티오피아 에녹서 104:6). 천사들은 먹지도 않고(토빗서 12:19), 결혼도 하지 않는다(에티오피아 에녹서 15:7).
또한, 내세에서는 부활한 자들이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아이를 낳아 번식하는 일도 없고, 장사나 무역도 하지 않고, 질투와 미움과 다툼도 없으며, 의로운 자는 머리에 관을 쓰고 앉아서 하나님의 광채를 즐길 것이다(b Ber 17a).}(막 12:25의 주석).
이어서 예수님은 부활을 입증하시기 위해 사두개인들이 인정하는 모세 오경 중 하나를 들어 【31】“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출애굽기 3:6과 3:15이다.
예수께서 출애굽기 3:6을 해석하시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칭하시지 않았다. 즉, 현재형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이 모세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죽은 자들이나,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된 자들이며, 현세의 삶에서 내세의 초월적인 삶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눅 16:19-31, 빌 1:21-23④).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단언하신 것이다. 이 단언은 하나님께서 죽어 없어진 자에게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부활 이전이든 이후이든 살아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그의 사랑도 구원 행위도 신실성도 다 허구일 수밖에 없다. 영원불변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 약속과 구원 행위는 인류의 죽음을 한계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이 끊을 수 없는(롬 8:38-39)⑤ 영원한 것이다.
무리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라고 하였다.
“놀라더라”는 엑세플레스손토(ἐξεπλήσσοντο)이며 ‘두려움’, ‘경이’, ‘넘치는 기쁨과 같은 강한 느낌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의 놀라움’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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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 Parker,“Teacher” in IDB, Vol, pp. 522-523.
2) 저자의 마가복음 12:18-27의 주석과 누가복음 20:27-40의 주석을 보라.
3) 부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저자의 로마서 1:4의 주석을 보라.
4) 저자의 빌립보서 1:21-23의 주석을 보라.
5) 저자의 로마서 8:38-39의 주석을 보라.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78-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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