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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 (이계준 목사님 연세대 명예교수)
유삼봉
- 1306
- 2018-04-16 14:35:34
갈 5:1 이계준 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1.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황무지”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엘리옷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절규한 것을 한 평론가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 자연의 섭리와 더불어 꽃피는 4월은 낭만파 시인들에게 예찬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모든 생명들이 마모되어 더 이상 진정한 꽃을 피울 수 없는 황무지 같은 현실, 더 이상 뿌리내릴 한 뼘의 땅 조차 찾을 수 없었던 절망과 몸부림은 엘리엇으로 하여금 문명비평적인 절창(絶唱)을 부르게 하였다.‘
엘리엇의 시각에서 보면 지난 세기의 4월은 실로 잔인했습니다. 현대신학을 철학의 범주에서 사회학으로 방향 전향시킨 독일 신학자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M. L. 킹 목사가 보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교회를 섬기면서 흑인 인권운동에 투신했다가 흉탄에 쓸어졌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4월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4.19학생의거와 세월호 참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운명을 실은 4월호 열차는 동서양의 협곡 사이를 건너는 어설픈 외줄타기처럼 위험천만하여 우리를 불안케 하고 5, 6월로 예정된 미북 비핵화 회담의 핵 분진이 이미 우리의 삶을 뒤덮어 공포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4월이란 잔인한 달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잔인한 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새 생명으로 다시사심을 축하한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악의 세력이 창궐(猖獗)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환희의 찬송을 부르는 것은 종교적 마취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므로 이 땅에서 죄악을 물리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라는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2.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생명의 능력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 5:1)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는 자기상실에 빠진 인간을 원상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은 자유로써 하느님과의 영적 소통, 이웃과의 사랑, 자연과의 공존에서 생성되는 관계적 자유라고 암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사랑, 자기중심에 매몰된 나머지 관계적 자유를 포기하므로 자기소외와 자기상실을 자초하는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파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해결은 지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자유는 실존적인 동시에 현실적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통치로써 새 생명에 참여하는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라는 로마 식민지치하에서 선민의 주체성을 망각한 채 가난과 무지, 율법과 권력의 노예가 된 백성들에게 영적이고 일상적인 해방과 자유의 삶을 제공하는 지상낙원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당시 유대교 지도층에 큰 충격과 위협이 되었고 로마 권력에 저항세력으로 비쳤기에 그는 결국 로마의 정치형인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생명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생명의 위력은 제자들에게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생명이 노예상태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계속 선포하고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이유는 하느님 나라 선포를 계승한 제자 공동체를 멸절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독보적 지식인으로, 율법 교사로, 또한 로마 시민으로 겉모습은 화려하였으나 그 속은 욕망에 멍든 노예이었습니다. 환영으로 나타난 부활의 그리스도는 사울을 한순간에 세속의 노예에서 해방하여 주님의 노예 곧 참 자유인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게 된 배경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인간적, 세속적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우리의 체험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막14:29) 인간은 자신만만할수록 베드로처럼 자기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나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지난 20세기 지성들이 이러한 인간의 자기 노예화의 모순을 지적하였습니다. 사회심리학자 E. 프롬은 ‘근대 인간이 긴 역사를 통해 자유를 쟁취하였으나 자기가 만든 사회적 장치 곧 정치, 경제, 사회란 거대한 톱니바퀴로 전락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신학자 P. 틸리히는 현대의 도착된 이념에 관해 평하기를 ‘신을 부정하는 현대인은 물질주의, 공산주의, 과학주의 등을 주조하여 절대시하고 신격화하므로 자기가 만든 우상의 노예가 되고 결국 그 우상은 인간을 파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21세기 “4차 산업혁명”에 직면하여 한 정신의학자는 새로운 노예화를 경고합니다.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의 검색만으로도 편하게 살고 있는데 앞으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안전한 선택을 대신할 때 편리와 안전의 대가로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잃고 기계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이렇듯 다양한 현상들 가운데 지금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노예화하는 것은 물신주의와 사회주의란 우상입니다. 이사야의 말과 같이 ‘우리가 입으로는 하느님을 가까이하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합니다.’(사29:13)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왜곡된 자본주의의 탁류에 휩쓸리거나 이미 역사적으로 폐기처분된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섬기며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 예언자가 됩니다. 이들은 모두 물신주의자로써 하느님께 대한 배신은 물론 하늘의 은혜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유와 풍요의 사회를 비인간적, 비 인륜적 나락으로 전락시키는 죄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식이나 명성, 재물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존재 없이는 개인도 사회도 갱신될 수 없고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피조물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감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새 사람이 되기 위해 낡은 자기중심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욕망이 자초한 자신의 노예화의 죄를 깊이 깨닫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힘입어 참 해방과 자유의 향연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자유인은 고난당하는 이웃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도록 섬기고 헌신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만 만족하고 도취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노예화에 다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만의 자유에서 탈출한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롬9:3) 바울이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 자기 민족과 단절한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져도 좋다고 할 정도로 자기 겨레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율법의 굴레에 갇힌 동족을 그리스도의 참 이스라엘로 거듭났으면 하는 열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6.25전쟁 이후 우리 생명과 국가 존망에 직결된 가장 엄중한 위기에 직면했는데 사방을 들러보아도 우리와 나라를 살릴 전사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어 보입니다. 자유당독재는 자유민주주의를 세웠고 군사독재는 경제발전을 이루었는데 군사독재와 투쟁한 집단이 사회주의 독재가 맜다면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노예사회를 조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노예화에 항거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의 빛나는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885년 부활절 아침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와 아펜젤라 박사가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적 포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은 황폐한 이 땅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문맹의 어두운 세상을 문명의 빛으로 밝혔으며 사회혁신과 민족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기미년 3.1운동 당시 교통통신이 전무할 때 SNS역할로 전국적 만세운동의 촉매제가 되었고 독립선언 33인 중에 개신교 목사가 15명이었으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한 최대의 희생자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 우리교회는 반공정신의 보루가 되었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사회와 백성을 회생시키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명을 다 하려면 불의한 수단 대신 복음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겸손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자유로 인도하려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나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적절히 섬김으로 그들을 자유의 복음으로 초대하고 나도 복음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고전 9:19-23)
따라서 우리가 이웃을 위한 자유인이 되려면 먼저 개인주의적 안일과 물신주의란 우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 곧 인권과 자유를 부정하는 불의의 세력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사사로운 말씀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저는 독재에 식상한 사람입니다. 일제하에 태어나 식민지교육을 강요당하였으나 3.1운동 때 선친의 옥고를 알고 일제에 항거하며 자랐습니다. 5년 동안 김일성 독재 하에서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염증을 느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자유하려고 신학교로 갔습니다. 6.25당시 피난민으로 남하하여 자유를 누렸으나 대학의 이념이 “진리와 자유”를 실현하다가 군사독제에 의해 해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인생은 불행하게도 독재와의 악연의 점철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독재하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부모님과 스승님들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를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뒤늦게 철들어서야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제 삶의 중심과 스타일은 자유가 되어 방종으로 비치기도 하였으나 평생 가족들과 친지들, 제자들과 교우들과 스스럼없는 자유의 교제로 인해 삶의 기쁨과 풍요를 구가했습니다. 남은여생도 이 귀한 가치를 후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잔인한 달 4월에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므로 그의 부활생명이 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담대하게 서서 오늘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시는 여러분께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