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36)

최세창
  • 1366
  • 2018-05-15 19:11:25
재림에 대한 예언을 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사건과 관련하여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교훈하신다. 【32】“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로 시작된다.
“비유”(파라볼렌, παραβολήν)는 παρά(‘곁으로’, ‘넘겨’, ‘건네어’)와 βάλλω(던지다)의 합성어이며, 한 사물을 다른 사물 곁에 두어 비교함으로써 깨우치는 방법을 의미한다. 비유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예언자들이 사용한 것이었다(삼하 12:7, 사 5;1-7).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위대한 학자이며 교사인 랍비들도 종종 그들의 교훈을 인식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①라고 하였고, 또 “예수님은 앞서 사용된 비유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유대의 교수 형식을 취하여 새로운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채우셨다.”②라고 하였다.
{하늘의 의미를 가진 지상의 이야기인 비유(W. Hendriksen)는 듣는 사람의 이해력이 아니라 영적인 응답을 시험하도록 고안된 것이다(R. A. Cole).}(막 4:2의 주석).
“무화과나무”(2:19의 주석을 보라.)는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나무들(올리브나무, 오크, 테레빈나무)과 대조적으로 겨울에 잎들이 떨어지고, 또한 아주 이른 봄에 꽃피는 아몬드와 대조적으로 늦봄에야 생명의 징후들을 보인다. 무화과나무의 가지들이 가지 속에 흐르는 수액 때문에 연해지고, 잎들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33】“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고 하셨다.
“이 모든 일”은 24:1-28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제자들과 동시대인들이 생전에 목격할 수 있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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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W. Barclay, and Jesus Said(Edinburg: The Saint Andrew Press, 1972), pp. 10-11. 랍비들이 사용한 비유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비유들과 유사한 랍비들의 비유도 소개하고 있다.
2) Ibid.,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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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징조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자(ὁ υίὸς τού ἀνθρώπου)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호칭한 것으로 문자적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다. 이 용어는 본서에 30회, 누가복음에 25회, 마가복음에 14회, 요한복음에 12회 사용되었다. 인자란 장차 심판자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니엘 등이 사용하였다(단 7:13-28, 에녹서 46). 예수님이 여기서 이 용어를 쓰신 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성육신하신 자신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아주 접근되어 있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원문에는 ‘가까이 이른 줄’(ἐγγύς ἐστιν)의 주어가 없으므로 ‘인자’, 또는 ‘그것(그 일)’, 또는 ‘때’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재림, 또는 재림의 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3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라고 하셨다.
“이 세대”, 즉 현세의 전 인류가 “지나가기 전에” 마지막 때의 징조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35】“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웅장한 결론적 진술인 이 말씀은 우리가 최대한으로 강조해야만 할 말씀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는 {영광스런 갱신(W. Hendriksen)이나 아름다운 재형성(E. Bickersteth)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사라지는 것③을 의미한다(시 102:25-27, 사 51:6, 고전 7:31, 벧후 3:7, 10, 13, 계 21:1-5).}(막 13:31의 주석).
“내 말”은 종말론적 교훈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사 40:6-8, 벧전 1:25).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영원토록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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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 W. Wessel, “Kmmel”(in J. Gnilka, 하권, p. 274), J. Gnilka, 하권, p. 274, 山口 昇,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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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예수님은 【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의 “그 날과 그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및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날”은 예언서에 사용된 공식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것은 야웨의 출현을 선언하는 문장에서 확실히 종말론적 반향으로 나타난다(암 8:3-9, 13, 9:11, 미 4:6, 5:9, 7:11, 습 1:9-, 3:11, 16, 옵 8, 욜 3:18, 슥 9:16). 여기서는 “하늘의 ‘천사들’(앙겔루스, ἀγγέλους: 1:20의 주석을 보라.)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로서 남아 있는 날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때를 유보했다는 사상(슥 14:7, 솔로몬의 시편 17:23, sBar 21:8)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중요한 일들을 모른다는 사상도 유다교에 널리 알려져 있다(참조: 제 4 에즈 4:52, 벧전 1:12, 엡 3:10)”(J. Gnilka, 하권, p. 275).
그렇기는 하나, “아들도” 모른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을 근거 삼아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1) 삽입(F. C. Grant), 또는 아리안파의 삽입이라는 설(Ambrose),④ (2) 아셨으나 제자들에게 고할 일이 못 되었다는 설(Augustine, Bruce),⑤ (3) 성부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 복종과 겸손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설(H. Alford, D. W. Burdick, 黑崎幸吉), (4) 사람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사 자기 몸을 비우신 그는 여기 대해서 일부러 알지 않으신다는 설(C. R. Erdman), (5) 성부는 계획자, 성자는 계시자, 그리고 성령은 보존자이실 것이므로 재림의 시기를 작정하는 일은 성부에 속하고, 성자는 그 날에 재림하셔서 심판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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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이상근.
5)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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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성부의 계획을 성취시키시는 것이라는 설(이상근), (6) 그의 인성은 알지 못했으나 신성은 아셨다는 설⑥ 등이 있다.
누가복음 2:52의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와 빌립보서 2:7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등을 보아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6)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산너(A. E. Sanner)는 “절대로 아무도 그 날과 그 시를 알 수 없다는 이 절의 강조된 단언은 날짜를 정하는 자들에게 자갈을 물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익살을 부려 말하기를, ‘그 날과 그 시간은 몰라도 재림의 해는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 사실은 예수의 재림 날짜를 예언하려는 인간 편에서의 모든 노력―그 상상된 날이 1843년이든 1844년이든, 아니면 1844년 10월 22일이든 1914년 가을이든, 보다 후기의 어떤 날이든―의 헛됨과 죄악성을 증명해 준다.…소란스러움, 주제넘음, 건방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라고 비판하고 있다.}(막 13:32의 주석).
심지어 최근에도 국내외에 자칭 재림주라고 주장하거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한 이단자들도 있었고, 또한 현재도 그런 이단자들이 활동하거나 암약하고 있다. 또한, 그런 이단자들로 인해 생기는 피해 중 가장 큰 피해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재림의 시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감춰진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만한 도전이다. 하나님께서 모르게 하신 것은 모르고 있는 것이 겸손한 신앙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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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J. Calvin, J. Wesley, J. A. Bengel, “Tillotson”(in M. Henry), “Ellicott”(in 이상근), M. Henry, E. Bickersteth, W. Hendriksen, E. P. Gould, W. W. Wessel, J. D. Stevens, C. E. G. Swift,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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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62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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