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전통, 체험 그리고 회심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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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2 21:36:49
웨슬리는 성경을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들로부터 성경과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웨슬리는 배운대로 열심히 행하려 했으며 남다른 헌신과 수고와 노력도 보였던 경건주의자의 후예와 같은 삶을 살려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회적 열심은 미국의 선교사의 시절로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한 마디로 웨슬리의 선교여행은 실패로 끝을 낸 것이다. 그리고 모라비안 교도들 앞에 철저히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들춰져야만 했었다.

웨슬리는 이단이라 경멸하던 모라비안 교도들에게서 자신에겐 없는 그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확신이며 그것은 분명함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진실함이었다. 당시 영국 국교회를 대표적 영성자라 한다면 웨슬리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회의 신부라는 자부심도 웨슬리 자신에게 없는 확신과 분명하지 못한 진실함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영적인 부분에서 성공회는 국교회라는 멋진 타이틀을 갖고 있었지만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영적 싸움에서 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날 감리교회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다.

감리교회는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이라 자칭한다. 어쩌면 그말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웨슬리의 감리교회 운동이 개신교의 교리적인 측면을 떠나 영적인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감리교회는 영적 부흥이 있었던 장자의 교단인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 자부심은 오늘날 이단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며 이단들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 생각을 하는가? 아니라... 전혀 아니라... 내가 감리교 목사이지만 이단들보다 잘하는 것... 그것은 싸움박질 그것도 교단의 장을 두고 나뉘고 나뉘어 서로 치고 박고 다투고 있는 정치적 싸움과 법적인 다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을 한다.

어디 감리교회 안에 영적인 싸움의 모습이 있으며 어디 영적인 싸움에서 이단들을 이기고 있음이 있는가 말이다. 교회마다 현관 문 앞에 가보라. 신천지가 두려워 교회에 오지 말라는 경고문이 교회마다 붙어 있을테니 말이다. 신천지와 이단을 두려워 하는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사람의 교회일 뿐이다.

말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개혁을 하자. 갱신을 하자. 새물결을 일으키자 등등의 말잔치는 넘치지만 결국 그 뒤엔 정치적 싸움박질 외에 무엇이 있는가 말이다.
말로는 종교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라 떠든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여 보라.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면 얼마나 냉정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가 말이다. 감독회장 성거가 무효가 되었고 감독회장이 직무정지가 되었으며 연회에선 온갖 불법적인 관행이 합법으로 가장되어 통과되고 있는가 말이다.

우리 감리교회가 다시 말만 번지르르함이 아닌 진실한 회개와 되돌림이 있어야 한다. 웨슬리의 회심이 또 다시 감리교회 안에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갈망과 이러한 마음을 담고 이 찬양을 들으며 글을 써나가려 한다.

성경...

웨슬리는 교회를 통해 성경을 지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경건주의자들로부터 종교적 열심으로 배웠으며 익히려 했다. 웨슬리는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려 했던 열심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은 보기좋게 실패로 끝이 났으며 열심을 행하면 행할수록 죄를 짓고 있는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볼 뿐이었으며 이단이라 여긴 모라비안 교도들 앞에 철저히 무너져야만 하는 무능력함이 되었으며 구원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속된 열심이었음을 보았던 것이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 이 모든 사실들이 분명해 졌다. 그러나 회심을 통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놀랍고도 전혀 새로운 역사였던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웨슬리가 처음 듣게 된 말씀일까? 아니다. 어쩌면 웨슬리는 로마서를 달달 외울 정도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서에 대한 웨슬리의 지식이 오직 한 구절의 성경 말씀앞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성경 말씀은 지식인 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성경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의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이러한 생각이 철저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진실을 경험케 된 것이다. 성경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 그 자체이며 믿음의 삶이 성경이며 믿음의 사람들을 살게하는 거룩한 영의 능력이 성경임을 알게 된 것이다.

성경은 책이 아니며 지식도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이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삶을 바르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말씀임은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의 회심은 성경에 대한 재발견과 같으며 성경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는 생명 그 자체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의 회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단어가 성경이다.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말이다. 이 회심을 통해 비로서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성공회의 신부로 설 수 있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확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 웨슬리도 그 확신이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분명한가? 그렇다면 나 웨슬리도 그 구원에 대한 분명함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어떠한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두렵지 않은 당당함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 웨슬리에게도 그러한 당당함이 이젠 여기있으니 그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이자 증언이다. 이제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보자.

교리와 장정 [49] 1. 성경 "성경은 우리 믿음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믿음에 대한 해석의 진실서과 신빙성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성경은 최우선적이다."

전통......

전통은 역사이다. 성경 그 자체가 역사이며 전통이다. 성공회 또한 그 역사이며 교회의 도 다른 전통이다. 감리교회도 그 전통을 따르고 그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이 전통은 유대사가 아니다. 기독교사가 아니며 교회역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대교가 전통이 아니며 케톨릭이 그 전통도 아니며 성공회와 감리교회 또한 그 전통이 아니다.

전통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전통이며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전통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하나님의 역사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살아 숨쉬는 전통에 대한 또 다른 살아 역사하는 증언이다. 그러기에 성경이 성경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결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전통이 또 다른 전통이 되는 것은 동일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변화이자 회심이며 생명으로 풍성케 됨을 의미한다.

전통은 거룩한 영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창조와 경륜과 섭리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하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바로 웨슬리가 말하는 전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보자.

교리와 장정 [50] 2. 전통 "전통은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모범적인 유산이다. 이 전통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안에 간직한 복음의 진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인간의 잘못으로 얼룩지게 되며, 이때 성경은 전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체험.....

웨슬리는 경건주의자 적인 체험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열심당원이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아 나고 말았다. 목회자로서도 실패이며 믿음의 성도로서도 보기좋게 실패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우연히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게 하셨으며 올더스케잇 거리로 이끄셨다. 이것을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 또는 견인의 은혜라고도 설명을 하였다.

웨슬리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내적인 변화이자 놀라운 영적인 회심을 체험헤 되었다. 체험은 모든 흐린 것들을 분명하게 한다. 성경의 지식으론 너무도 흐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웨슬리는 그 흐려져 있던 것들을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그 믿음의 확신도 웨슬리는 체험케 됨으로써 누구보다 더욱 선명한 구원의 역사이자 성령의 역사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지금껏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던 그 어떠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어떠함은 늘 가려져 있었던 비밀스런 역사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 누구보다 분명히 깨달았고 보았다. 그 비밀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하심 임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체험이며 고백이자 증언이 된 것이다. 웨슬리에게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믿음의 체험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제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보자.

교리와 장정 [51] 3. 체험 "웨슬리는 체험적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이며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외적 열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체험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회심....

웨슬리의 회심은 각각 따로 따로인 것으로 인식을 했었던 성경, 전통, 체험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회가 되었다. 성경은 전통을 전통은 또 다른 성경이 되게 한다. 그리고 성경과 전통은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에 있음이 아니라 인간들을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체험되어지며 이 체험을 통해 비로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세워지고 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의 책이나 지식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삶의 지혜이자 진실임을 증언하게 됨으로 성경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자 전통이며 체험임을 알게 된 것이다.

회심은 웨슬리가 한 것이지만 웨슬리 스스로에게 나온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종교적 열심을 갖으면 갖을 수록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고 체험했으며 그러한 진실이 성경과 믿음의 전통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음을 알게되고 믿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된다.

회심은 웨슬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영적인 훈련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직 웨슬리를 웨슬리되게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심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하심이었다.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역사는 성경을 성경이 되게 하며 교회의 전통을 진실한 믿음의 전통이 되게 하며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삶의 체험 가운데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이자 회복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전통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성령에 대한 주님의 증언을 들으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이 말씀이 체험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에 의한 회심이며 회심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겐 이 모든 말씀들이 너무도 분명하게 들릴 것이며 보일 것이며 만져지기도 하는 삶의 살아 있는 생명의 체험이 될 것이다.

진정 성령의 체험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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