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을 통해 나타나는 내적(영적)변화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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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8 19:31:38
회개란 말과 회심이란 말은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아마도 그 단어적인 뜻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회심은 매우 큰 의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은 복음의 시작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말엔 권면이 있으며 선포가 있고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개하라는 것은 이 말(복음)을 듣고 돌이키길 바란다는 뜻이 내포 되어 있으며 그 돌이킴의 주체는 듣는 사람에게 있음을 말 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말씀(복음)은 어떤 의미에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선행적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행적 은혜로써의 복음은 듣고 회개할 사람은 회개하겠으나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회개치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엔 듣는 자의 강한 의지와 선택이 필요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자 우리의 결단과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허락하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심은 어떤 의미일까?

회심은 회개와 다르게 회심하려는 자의 의도성이나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돌이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주체는 회심하는 자에게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회심케 하는 그 분의 능력과 의지가 함께 함을 통해 나타나는 다소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의미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죄를 고백하며 돌이키려는 자의적인 표현이라 한다면 회심은 그 누군가(주님)에 의해 피동적으로 고백해야 하며 돌이켜야 하는 타의적인 회개를 말함이라 할수 있습니다.

결국 회개의 더 깊은 내적이며 영적인 회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회심이란 뜻입니다.

성경엔 회심이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반면 회개란 표현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여기 저기에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러하며 선지자들의 외침이 그러하고 제자들과 믿음의 선조들의 가르침이 다 그렇다 할 수 있습니다. 복음(말씀)의 선포는 하나님의 선행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심이란 단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니 비성경적인 말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엔 단어적으론 회심이란 표현은 없지만 이 회심은 회개한 이들의 언행 즉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의 모습속에 감춰진 비밀스런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이란 단어는 성경엔 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들의 삶의 변화가 바로 회심이니 회심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 또한 성경적인 표현이며 믿음의 모든 선진들이 보인 그 거듭난 삶 자체로서의 단어이자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속에 감춰져 있는 비밀스런 단어이기도 합니다.

회개란 회개하고서 또 죄를 지을 수 있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도적이 더 이상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 결심을 하였지만 또 다시 남의 것을 훔치게 되는 그런 경우를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를 진실한 회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은 회개하고서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더 이상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노라 회심을 하였다면 그 이후 그의 삶엔 반드시 남의 것을 훔치려는 죄를 비롯한 또 다른 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삶의 거듭남 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를 회심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경우에 따라선 성화로 갈 수도 있고 아니 갈 수도 있는 선택적 의지이지만 회심은 반드시 성화의 삶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끌림이자 거듭난 자의 삶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과거의 삶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라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웨슬리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경건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면 할 수록 날마다 해야하는 수없이 많은 구약의 희생제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자신을 더욱 더 괴롭히는 올무가 되었고 노력하면 할 수록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율법적인 굴레가 되어 웨슬리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또 다른 삶의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웨슬리는 회개에 이어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듣게 된 복음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회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회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수동적 피동적 어찌 할 수 없이 이끌리는 이끌림이자 삶의 발버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회심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 포기이자 자신이 설정한 삶의 목적에 대한 포기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결단에 대한 포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포기를 또 다른 표현으론 온전한 내려놓음이라 하기도 합니다.

결국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영적이고 내적인 포기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더 이상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스스로 만든 율법을 따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려 하면 행할 수록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회심을 통해 누구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 깨달음은 결국 과거의 종교적(겅건주의적) 열심을 통해선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자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각...

이것은 어찌 보면 회심이란 변화와 결부시킨다면 옳은 표현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기에 내가 느낀다고 하기보단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단맛을 어떻게 느낄까? 단맛은 느끼고 싶어 느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단맛이 나니 달다하는 것 입니다. 쓴맛도 그렇고 모든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오감의 자극이 오니 그것을 오감의 신경쎈서를 통하여 이러하다고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모든 오감을 비롯한 자각과 영감으로 느낄 수 있는(깨어있는 영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웨슬리는 과거에 성경을 통하여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지는 스스로 느끼려 하지 않으면 느낄수 없는 의지적인 느낌이자 자각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이러한 죄에 대한 자의적인 자각을 키워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 웨슬리는 그 어떤 성경이나 율법을 비롯한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없어도 죄가 어떠한 것인지를 느낄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웨슬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모든 지식들은 이러한 죄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 보단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만약 성경과 율법과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가름침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죄를 자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과거의 모든 신앙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다 쏟아 버려야 할 것 뿐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배설물을 쏟아 내어야만 오히려 새로운 영의 양식을 통해 배부를 수 있으며 영의 양식을 소화하여 영적인 삶의 자양분으로 삶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이 영의 양식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성만찬으로 기념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것이라는 진실을 웨슬리는 보고 듣고 이제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이자 성령의 충만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만찬은 주례자의 성별의 기도로 성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기념하는 것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에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는 신비임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자각인 것입니다.

영적 자각은 우선 죄에 대한 자각이 예민해지고 또 예민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 되어 자신에 찾아오는 위험을 감지 할수 있는 스파이더 쎈서가 생긴 것과 같이 회심 이후 웨슬리에겐 죽어 있었던 죄의 쎈서가 되살아 나게 된 것과 같으며 이것은 죄에 대한 영적으로 예민해진 자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죄에 대한 자각 쎈서가 예민해지면 예민해 질수록 진정 자신이 무엇을하고 있었는 지를 보게되고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이 영적 자각 때문에 웨슬리는 과거 자신이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오히려 죄를 짓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스스로 그 모든 사실들을 자각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자각쎈서는 지난 모든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악들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았던 죄까지도 낱낱이 자각케 하며 회개케 하는 능력(회개의 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고 또 의심하게 되며 괴로워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열병(뜨거움)이 됩니다.

이 영적인 열병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기에 혹 미쳐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새롭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며 놀랍기도 하지만 또 두렵기조차 한 변화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이웃들이 본다면 드디어 웨슬리가 미쳐간다고 할지도 모르는 변화이었기 때문이며 이 변화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열병도 심미적 육체적 열병임으로 실제 이 영적인 열병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 열병에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웨슬리의 부모 조차도 회심의 열병에 걸린 웨슬리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러한 영적 열병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며 염려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웨슬리는 누가봐도 모범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열병은 육체적으로 모범적인 자들에겐 불필요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극적인 변화이자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은 이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오히려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두려운 위선적인 모습이었는 지를 알게 되었기에 도리어 그들은 그러한 염려와 질책을 받아 들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죄의 자각은 또 다시 영적인 갈등이라 할 수도 있는 영적(내적)인 논쟁을 갖게 합니다.

이 영적(내적)인 논쟁은 주변 사람들과 하는 논쟁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성령과 자신과의 논쟁(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라 하면 웨슬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논쟁이자 자신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성령과 웨슬리 자신과의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은 끊임없이 웨슬리 자신을 과거의 웨슬리로 이끌려 하였을 것입니다. 반면 새 사람은 끊임없이 웨슬리를 옛 사람으로 부터 새로운 거듭난 사람의 깨달음으로 이끌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령은 끊임없이 웨슬리를 몰아 붙이기를 절벽 끝까지 절대 용서와 자비가 없음처럼 밀어 붙이려 할 것이며 웨슬리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방어적인 합리화와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기에 급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싸움에서 옛 사람은 새 사람에게 백전 백패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성령을 향해 온갖 자신의 합리화와 핑계거리를 만들면 만들수록 밀리고 밀려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영적인 낭떨어지와 같은 절망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 입니다.

웨슬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성령) 자비하시며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어찌 이렇게 내게 가혹하게 하느냐고 따지며 불평하는 영적인 싸움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웨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주님은 너의 머리터럭조차도 세심바가 되시며 너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어쩌면 너 보다도 잘 알고 계시니 주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며 스스로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더 이상의 합리화와 핑계는 결국 또 다른 죄의 모습 일 뿐 거룩함이나 선이 아님을 알게 하셨을 것입니다.

결국 웨슬리는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십시요. 나는 죄인이니 나의 모든 죄에 대하여 벌하여 달라고 요청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생명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마지막 삶의 몸부림을 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쏟아 버리고 내려 놓고난 후에서야 웨슬리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것 입니다.

"그래 됐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동안 네 속에서 울부짖는 죄의 소리를 들었으며 욕망의 소리를 내가 들었었노라. 그러나 다시는 네 욕망의 종이 되려 하지 말고 다시는 그 어떠한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 말고 내게 배우라 내가 너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할 것이며 지혜롭게 하리라."

웨슬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 속에서 불타듯 타오르는 그 뜨거움에서 자유를 얻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느낄수 없는 시원함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웨슬리를 비롯한 참 믿음의 선진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회심이며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삶의 변화이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을 성령의 세례라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웨슬리는 이러한 영적인 싸움(논쟁)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영적인 교통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교통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교통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이라 여겼던 많은 이들의 영들입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영들과의 교통을 통해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영적인 지혜들을 얻게 되었을 것 입니다.

웨슬리가 만나게 된 영 중에는 반드시 이 두 명의 영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 첫째는 가룟인 유다이며 그 둘째는 욥입니다. 물론 또 다른 많은 영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 교제는 귀신들과의 접신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믿음의 형제들과의 살아 있는 교통이었을 것입니다.

회심을 통한 영적 자각은 영적인 논쟁(싸움)을 경험케 될 것이며 영적인 논쟁은 성령님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믿음이자 살아 있는 영들과의 교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교제를 통해 웨슬리는 지금껏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던 영적인 지혜들을 듣고 보고 만질 수도 있는 영적인 깨달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성화(영적인 훈련)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그 어떠한 경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지금껏 행하지 못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변화된 회심자(거듭난 자)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제 회심한 자의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써의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이자 출발점에 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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