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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회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완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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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7 02:26:22
"大盜大氣 패러다임: 큰 도둑은 그 기도 쎈(큰) 법이다."라고 말이다.
KMC뉴스에서 감신대 이은재 교수의 강의록 전문이 올라와 있기에 그 글을 읽었다. 강의록은 대부분은 웨슬리의 생애를 입맛에 맞게 정리를 하였다. 그리곤 “존 웨슬리 정신과 신학의 빛에서 – 웨슬리의 실천적 종교와 영성”이라 하며 웨슬리와 무관한 혼합주의적인 말로 웨슬리의 실천적 종교와 영성을 일갈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단신학의 문제점이다.
웨슬리의 회심을 전후로 웨슬리의 삶과 신앙 그리고 사상도 놀라울 정도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과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회심에 대하여는 크게 다루지 않았다. 아니 다루지 못 했다 해야 할 듯 싶다.
이은재 교수가 다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어려운 문제를 웨슬리의 생애 속에 나타난 열정적 경건 훈련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은재 교수의 설명에 대하여 가장 서운해 할 이가 있다면 그는 바로 웨슬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및 성화는 경건생활(훈련)의 일환(결과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건주의적 가정환경과 경건주의 자들로 부터 받은 삶의 영향이 전혀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웨슬리의 회심을 이끈 것은 분명 아니다. 도리어 그 경건적 훈련이 도리어 회심을 방해하고 있었던 결정적 걸림돌이었음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회심 이전에 있었던 모든 배움과 체험들은 영성훈련이라기보단 웨슬리가 말하였던 '선행적인 은총'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심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신앙적인 삶과 경험 그리고 종교적 열심들은 영성 훈련이라기 보단 오히려 '영적인 방황기'라 해야 할 것이다.
회심은 사도 바울에게서 극명하게 그 변화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름조차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지 않았던가? 회심이전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율법으론 완전에 가까운 자였지만 오히려 그 때 자신은 죄인중에 괴수로 살았음을 고백하였다.
또한 회심 이전에 배우고 익혔던 많은 종교적 지식과 경험 그리고 열정은 모두 벼려져야할 배설물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회심 이전의 모든 경건주의적 열심은 영성 훈련이 아니라 영적 타락이며 죄를 짓지 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죄만 짓고 있었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회심이후 극심한 내적 열병을 잃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석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하며 눈이 멀어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바울에게 있어 회심 이후 웨슬리가 겪게된 심한 영적 열병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마음이 왠지 뜨거워 졌다 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 그 마음이 뜨거웠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만이 아니다 실제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워짐이 너무도 강렬하여 심장에 불이라도 붙은 듯한 통증도 수반되어졌을 것이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은 120여명의 제자들에게 불과 같이 임했다. 성령은 불의 혀같이 제자들의 심장속에서 타올랐다. 그 타오름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는지 그들은 뜨거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힘을 갖은 이들을 두려워 하였고 그에 따라 겁도 많았던 이들이 담대함을 보였다.
이 담대함은 용기라기 보단 그들의 절박함이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타는듯 타오르는 불과 같은 성령에 의해 이미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시장으로 길로 나간 것은 견딜수 없음이었고 살려는 발버둥과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120여명의 오순절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그리고 웨슬리는 공통적인 뜨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 뜨거움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진토처럼 버려야만 하는 삶의 변화와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내적인 혼란이 되었고 내적인 갈등이 되었으며 속에서 부터 타오르듯 자신을 태워 버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열심으로 행한 모든 종교적 열정도 태워졌다. 그가 그리도 열심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행했던 경건적 삶도 그 불에 의해 태워져 버렸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신앙적인 결과물들이 다 태워져 버린 것이다.
웨슬리는 이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령에 의한 회심이 있기 전, 죄를 짓지 않으려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보았노라 하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일맥상통하는 고백이다. 성령을 통한 회심을 경험하기 전 웨슬리와 사도 바울은 겉 사람으론 누구보다 의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속 사람으론 죄인중의 죄인이자 괴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순절 120여명의 제자들도 대등소이할 것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자신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를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말할 수록 그들의 그 뜨거움은 고통이 아니라 시원함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그들 속에서 자신들이 말하는 그 복음의 실체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게 되었고 성령의 감동에 의해 지금 까지 행하지 못했던 많은 역사들을 직접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방언이며 예언이며 치유의 은사이자 통변의 놀라운 능력들이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자신을 온전히 태워 버릴 듯 불타오르는 그 내적 고통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순절 120여명의 제자들은 밖으로 뛰쳐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면 웨슬리는 골방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복음의 여정을 떠나야 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웨슬리와 같은 그러한 경험이 있었을 듯 싶다.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를 만나기 전까지 골방에서 혼자 끙끙 열병을 앓으며 지금 껏 자신이 행하였던 모든 죄악들을 보았다. 율법적인 열심으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죄를 지어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몹시도 괴로워 했을 것이다. 그 아픔과 고통이 너무도 커서 차라리 죽는 것이 자신에게 좋겠다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회심은 이처럼 2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순절 120여명의 제자들과 같이 밖으로 뛰쳐나가 외쳐야만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는 성령의 세례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나 웨슬리와 같이 골방 깊은 곳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의 영적 열병을 앓으며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내면적인 죄를 보게되고 그 죄를 씻어야만 하는 내적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불과 같은 성령의 뜨거움을 경험케 되는 것이다. 이 뜨거움이 자신의 지난날의 모든 것을 낱낱이 다 태워 버리는 성령의 세례 즉 모든 죄에 대한 씻김을 경험하게 되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체험케 되는 것이다.
성령의 불에 의해 불타오르는 영적인 열병을 무엇이라 할까? 아마도 그 열병과 가장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기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케 되는 그 열병과 비슷하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말하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하고 보고 싶어도 볼수 없는 그 안타까움의 사랑의 열병은 상사병이라 표현을 하기도 한다. 상사병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놓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다. 그러나 그렇게 털어 놓지 못한다면 자칫 상사병으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성령의 역사는 사랑의 병과 같다. 성령의 불은 상사병의 그 뜨거운 내적 열병과 같다. 단지 그 대상이 사람을 향한다면 상사병이지만 하나님과 주님을 향한다면 거룩한 열병 즉 성령의 충만이 될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성령 충만의 열병을 앓으며 자신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보았다. 그 역사는 과거 이전의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른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 보게 하였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죄를 짓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수없이 지을 것만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배워 왔던 신학적인 지식과 경건주의자들의 지식은 그에 대한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단자라고 배척을 했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 자신 속에서 불과 같이 타올랐던 그 힘만이 그에 대한 답이 되어 준 것이었다.
사람으로썬 할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심을 보았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죄를 짓지 않으려 더 이상 노력하고 수고하지 않아도 죄를 짓지 않케 되는 그런 영적 경험을 웨슬리는 후에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 불렀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경험하였을 때 그의 영과혼과 육이 변하여 져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인간의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의미로서의 완전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교리와 장정 제1편 교리 [43] 3) 성화와 완전 중에서)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