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오재영
  • 1348
  • 2018-05-26 01:56:09
영혼을 인도하는 성직자에게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거듭남이 분명하여 소명에의함이 아닌, 남모르는 아픔을 겪어 고뇌와 함께 냉소주의로 환멸을 겪은 치명적인 상처가 있는 이들에게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덕목(德目)을 갖춘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쩌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힘들게 했던 행동과 습관이 무엇인지는 본인도 알고 있으며, 이제는 그들 나름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흔들리지 않는 변화된 인격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생각이다. 하물며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직자요 말씀의 사역자에게 누군들 그 마음이 왜 없겠는가?

오래전, 이미 주님나라에 계신 멘토되시는 목사님께서 어느 날, 질문처럼 물으셨다.
“저기 말이야,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런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런 사람은 되어야해...” 예를 들면, 친구끼리 논쟁하다가 한사람이 야! 아무개에게 물어보자, 할 때, 그러자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야! 관둬라, 그 자식 또 뭐라고 할 줄 아니...” 이건 잘못산 사람이지...당시엔 대우조선 분규로 세계의 유수한 언론들이 장생포 항구로 모여들고 국민들은 대부분 9시뉴스에 관심을 기울이든 때였는데...

오늘도 목사로서 살아가면서 주변에 다양한 이들의 논쟁을 보면서 이미 30여년이 지난일이지만 문득 목사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듯하다. 나자신을 전제로, “사람이 말야, 세상을 살면서 그래도...”

요즘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세상이교회를 비난하고 교회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공격을 하기 전에 이미 안에서 먼저 떠벌이며 동네방네 침소봉대하여 소문으로 날 밤 새우는 이들 때문에 확대된 온갖 정리되지 않은 왜곡된 소문으로 미리 알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물론 부족한 부분은 반성과 함께 바로 고치고 보완하여야 하지만 실수와 거짓말은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과 모두를 위하여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생각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개인이든 국가든 한 시대에 융성한 배경에는 그 나름의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점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사랑과 용서라 하고 일반사회에서는 관용이라 하기도 한다.
각자 책임있는 이들과 그에 관계된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용서와 사랑 그리고 관용...

유명한 장편 역사소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의
융성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전쟁에서 패한 장수에 대한 ‘관용성’을 들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는 제국을 넓혀가는 중에 주변의 수많은 나라들과 전쟁으로 수비와 함께 공격을 하게도 된다. 산악족인 삼니움 족, 겔트족, 게르만족을 비롯하여 그 유명한 카르타고와의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승리만이 아닌, 때로는 패전의 장수도 나오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그 패전의 장수에게 군율을 근거로 처벌을 능사로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두 번째의 기회를 주는 관용성을 베풀어 그다음 전투에서 패전의 쓰라림의 교훈으로 삼아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든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500여 년 동안 카르타고와 경합을 벌인다. 그 와중에는 로마의 존망이 걸린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로마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당시의 카르타고에는 용장이며 맹장인 그 유명한 한니발이라는 탁월한 장수가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와 한니발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그들은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성 전체를 불태우자는 의견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때까지 로마는 관용의 국가로서 점령한 적국(敵國)이라 하여도 성 전체를 불태워 초토와 시킨 예는 없었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심에 불타오른 그들은 끝까지 반대하는 당시의 승리한 장군, 스키피오의 청을 묵살하고는 카르타고성 전체를 불태우고 말았다. 그때 스키피오는 불타오르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울었다는, 그 유명한 ‘스키피오의 눈물’로 역사는 전해오고 있다. 그는 왜 울었을까? 그는 ‘불타는 카르타고에서 또 자신이 목숨바쳐지킨 자신의 조국 불타는 로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기를, “강한 적보다 더 큰 동기부여는 없다.”는 말이 있다.
로마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하고 호전적인 적국 카르타고로 인하여 언제나 매사에 황제와 원로원을 비롯한 온 국민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며 대비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리고는 긴장이 풀림과동시에 각처의 점령지에서 수탈한 풍요에 방종함으로 결국 스키피오의 예언대로 로마는 외부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 아닌 내부의 부패와 내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의 형편은 어떠한가?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 정당과 사회단체를 비롯한 이들마다 날이면 날마다 너나없이 남 탓 하며 자신들의 책임은 방기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진리로 교도할 성직자인 우리들의 영성과 실제모습은 어떠한가? 자신의 주변과 소속된 교단과 조국의 혼돈에 아픔을 느끼고는 있는가? 말씀에 대한 경건과 삶은 어떠한가? 마크 트웬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경가운데 모르는 부분이 아니라 내가 잘 아는 부분이다.”라고 했다.

또 목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 한다” 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듣고 또 듣고 들어도 날마다 새로운 복음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이들만이 자신의 형편이 위기임을 알고 엎드릴 뿐이다. 오직 그들, 받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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