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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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0 04:12:00
선지자, 구도자, 변증가...... 그리고 정치꾼

오늘날 교회엔 선지자 같은 목사가 띄엄 띄엄 가뭄에 콩 나듯 가끔씩 있다.
또한 구도자 같은 목사가 현대 신학의 발전과 함께 점점 더 많아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엔 아직도 변증가 목사가 가장 많다.

왜 변증가 목사가 가장 많을까?
그것은 변증이 제일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에서 설교나 자료들을 수집 짜짚기하여 한편의 설교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 목사들은 자신이 짜짚기 한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채 듣기 좋은 말과 그럴싸한 말들을 여기저기에서 따다가 붙이다 보면 많은 변증 목사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예,‘길을 잃은 세상, 길을 찾는 교회’)인지도 모르고 설교랍시고 떠들어 대는 경우가 허다함을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증 목사들을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변증이 아니라 모방이다. 그래서 포스트 모던이즘이 활개를 친다. 현대 신학이나 강단의 흐름도 언제부터인가 포스트 모던이즘을 표방하고 있다. 설교가가 세상의 사상을 이끌어 감이 아니라 세상의 이념이 설교가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는다.

그러니 영성은 바닥이 나고 인성도 바닥이 나고 오직 패거리 지어 자신들의 세만 자랑하고 자신들의 패거리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려 한다. 이것이 감리교회 안에선 인맥 위주의 흐름이 되어 학연, 지연, 쎔연 등등의 인연을 만들어 뭉쳐 다니며 정치화 하고 기득권화를 하려 함이다.

현대 신학의 흐름이 교회 강단에 들어와 포스트 휴머니즘이란 그럴싸한 이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구도자의 모습이다. 구도자 목사들은 제법 지식이 있고 제법 능력이 있으며 제법 실력이 있음으로 인해 목회적 고상함을 표방하는 설교자들이다.

구도자 목사는 언제나 겸손한 척을 한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의 헛점이나 단점 또는 잘못을 지적하기라도 한다면 갑작스럽게 변하여 화를 낸다. 그래서 구도자라 하지만 많은 구도자 설교가들의 실재에 있어선 구도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다만 종교적 고상함을 추구하는 설교자들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고상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양 종교의 대표적 모습이 사제들의 고상함이다. 이 고상함이 현대의 서방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서양 사람들의 의식 속엔 은근한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를 동경하는 경향들이 있음으로 본다.

동양 종교의 고상함은 명(관)상이다.
자연속에서 세속적인 모든 것을 멀리하고 신과 자연 그리고 자신의 일체를 이루려는 명(관)상 종교가 바로 구도자 설교가들이다. 그들은 설명이나 변증을 하려 하지 않는다. 구도자 설교가는 본이 되려 한다. 그래서 이러한 구도적인 명(관)상과 같은 행위들을 일컬어 영성훈련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붙여 활동을 한다.

도시화 되어 빠르게 변화하는 세속의 삶 속에서 쉼과 안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이 고상함의 대상자들이 된다. 시골에선 명(관)상은 배부른 짓거리다. 노동자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어촌이나 광산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구도자적 설교가들은 현지인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도시인들을 상대로 각종 쎄미나와 훈련 쎈터를 만들어 현지인과 외지인 사이에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구도자 설교자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힐링이다.
영과 육의 힐링 말이다. 그러나 육체의 약간의 유익을 위할 뿐이다. 영적인 유익은 찾아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상함은 또 다른 교만이기 때문이며 구별이며 분리주의일 뿐이기 때문이다.

구도자 설교가들은 수도(명상)원이니 뭐니 하면서 도시 생활과 거리를 두려함이며 산속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목가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설교가들은 도시인들에겐 호감이 되고 인상이 깊을 수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구도자들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배부른(돈 많은) 자들이나 하는 고상함이라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건강하면 뭐든지 옥케이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힐링이란 단어가 복음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구도자의 설교자는 종교 다원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더불어 종교의 화합과 평화와 공존을 역설한다. 설교가이기에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도 할 줄 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다. 성경말씀도 성경의 이야기도 자신들이 하고 픈 이야기를 위한 도입에 불과한 것이다.

명(관)상과 힐링 그리고 휴머니즘과 평화주의의 고상함을 위한 도입이 성경이고 성경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고상함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성경 이야기가 성경을 온전히 읽게 되는 영성이라고도 한다.

확실히 어줍잖은 변증설교보다 구도적 설교가 매력적이다.
배부르고 등따신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대리만족이 될 수도 있다.

고려의 불교가 왜 귀족 종교가 되었었는지 아는가? 궁금하다면 요즘 도시 교회들을 보라. 어떻게 귀족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가 말이다. 귀족 종교화된 불교나 귀족화된 교회나 그 겉 모습은 다르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대등소이하다. 귀족 불교엔 땡중화된 스님이 있을 것이고 귀족 교회화된 기독교안엔 먹사화된 목사가 있을 뿐이다.

현 한국교회 안에 선지자 목사가 있는가?
둘러보라. 누가 선지자 목사인가 말이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가 말이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목사들은 많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짜짚기 변증 설교도 많으며 구도자적 예수를 말하는 설교가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는 선지자 설교가는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왜 선지자적 설교자가 이렇게 줄어든 것일까?

왠래부터 선지자적 설교가의 수는 적었다. 그래서 교회는 커졌지만 타락했다. 교회를 찾는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실망하는 이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방황을 한다. 소위 말하는 가나안 교인들이 많아지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가나안 교인들이야 어느 시대건 그 숫자의 정확한 파악은 어려워도 늘상 있었던 일이기는 하다. 그러니 근래 교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대신 근래의 가나안 교인들의 말이 과거보다 많아진 것 뿐이다.
개독교란 말을 누가 말들었을까? 불교인? 이슬람인? 아니면 무속인? 그도 아니면 이단교인? 아니다. 단언컨데 개독교란 말을 만든 이는 가나안 성도 중 하나 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성도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교회에 실망하고 목사에 실망하고 기독교에 실망한 이들이 교회에서 나가며 가나안 성도가 되더니 이젠 그 누구보다 열열히 교회와 목사들을 비난하는 반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선지자적 설교가?
그는 이미 교회를 떠났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친기독교인이 아니라 반기독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교회를 만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기독교화 된 선지자적 설교가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단의 수괴들이다. 그들은 이미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가 되어 있음이다.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들은 변증적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도적 설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설교는 교회를 향한 실랄한 비난과 비판이 있다. 그들의 설교엔 목사들을 향한 비난과 성도들을 향한 무시와 조롱이 가득하다.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의 설교는 매우 단순하지만 힘이 있다. 이 힘이 때론 능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왜 이단과 사이지의 교주들의 설교가 힘이 있는 줄 아는가? 교회와 목사가 맛을 잃고 빛을 잃어서 그런 것이다.
왜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들의 설교가 능력이 있는 줄 아는가? 그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겐 기존 교회 목사들에게서 볼 수 없는 선지자적 외침과 비판과 정죄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말도 안되는 얘기도 청중들에게 통함을 볼 수 있다. 왠지 아는가? 그것은 기존교회와 목사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의 설교들을 들어보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말하지만 스스로 자칭 하나님이 되고 예수님이 되기도 하고 성령님이라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청중들에게 먹힌다. 왠지 아는가? 기존 교회들에는 그런 선지자적 설교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요즘 한국 도시교회는 어떤 목사들을 원하는가?
선지자? 아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
변증가? 아니다. 말이 너무 많으니 귀찮고 피곤하다.
구도자? 매력이 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박사학위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남들에게 보이기에 좋으며 자랑하기에도 좋다. 그래서 때론 말도 안되는 박사학위인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라도 있으면 좋단다. 아니 있어야 한단다. 이것이 고상함에 취한 도시교회의 모습이다.

시골(작은)교회는 그러면 어떤 목사를 원할까?
선지자? 아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너무한다.
구도자? 아니다. 위화감만 조장한다.
변증가? 아이고 예배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럼 시골(작은)교회는 어떤 목사를 원하는가? 성도들을 향한 서비스를 잘하는 목사다.
좋게 말하면 성도를 섬기줄 아는 목사이며, 막되게 말하면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포기한 목사인 것이다.
설교는 짧고, 예배는 단순하며, 열심히 심방 잘하고, 혼자 열심히 기도하는 목사 말이다.

그래서 서비스 변증가 목사가 있다. 짜짚기 된 설교를 짧은 시간내에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끝을 낸다.
그래서 서비스 구도자 목사도 있다. 설교는 명상과 관상을 위한 도입일 뿐이다. 구원을 위한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서비스 선지자 목사는 없다. 왜냐하면 선지자란 절대 성도를 섬기려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말한다면 가장 온전히 성도들을 섬기는 설교가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성도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니 말이다. 성도를 살리고 설교가도 살게 되는 생명의 설교자인 것이다.

서비스 목사들은 성도들에 의해 길들여진 현실적 목사들이다.

유대의 선지자의 시대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 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시대가 선지자 목회자들의 시대였다.
그들은 선포했다. 그들은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 외쳤다.

동시대에 초대교회엔 변증 설교가도 나타났다.
바로 사도 바울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설명을 했고 이해를 시키려 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이방인들에게 변증을 한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초대교회는 박해의 시기를 거치며 구도자적 목회자들의 시대가 되었다.
곧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에서 자라난 교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나마 교회엔 교부들의 시대가 지나가자 교회의 세속적인 성공과 맞물려 세속적으로 타락하기 시작을 하였다.
교황과 추기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귀족 기독교.... 중세의 그 암울한 시기를 귀족 교회의 주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교황과 추기경들이 만들었다. 정치꾼 목회자들이 나타나 교회를 귀족화, 정치화를 시킨 것이다.

정치는 세속 기득권을 두고 나타나는 세속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가 세속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은 정치꾼 사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꾼 목사들이 나타나면서 교회는 귀족화 정치화되어 세속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타락은 맘몬을 숭상함이며 세속 권력을 쫓음이다.

정치꾼 목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가 바로 선지자들이다.
교회 안에서 교회안에 속한 선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가 그러했고 모든 선지자의 시대가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교회(감리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꾼화된 변증적 설교가들이 너무 많다.
정치꾼화된 구도적 설교가들이 너무도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와 같은 설교자는 설자리를 잃어 간다.

정치꾼 목사는 기득권(교회와 성도)을 지배하길 원하는 목사들이다.

선지자적 설교자를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정치꾼 변증 목사들과 정치꾼 구도적 목사들의 잘못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이것이 교회안에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이 함께 나타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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