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지혜를 통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 것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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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5 07:48:17
비유라 하니 좀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고 특정 비유해석학파들의 견해를 고스란히 따르는 것처럼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생각을 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유적 해석을 무조건 무시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 비유적 해석이 성경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성경의 말씀은 성경 말씀 그 자체로도 인정해야 하며 성경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또 성경 구절과 관계된 또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관주나 주석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기초적인 작업이다. 성경은 관주와 주석을 뛰어 넘어야 한다.

성경 해석에 있어 관주와 주석을 뛰어 넘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이러한 방법(?)을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해석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을 한다고? 그것이야 말로 제 멋대로 해석하자는 말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성령의 감동이 뭔지 알고 질문하시는 것입니까?"

성령의 감동은 성경의 원저자이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위 말씀을 모르는 성도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학교 교수들에게 물어보라. 신학교 교수들이 말하는 성령의 감동이 무엇인지 듣게 된다면 순진한 성도들은 시험에 들 것이다. "신학교 교수가 맞아?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 하나도 은혜가 않되네...."
그래서 순진한 신학교 1학년생들이 정작 신학교에 들어가 시험에 들게되고 회의감을 갖게 되고 심지어 방황하게 되며 심지어 신학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듣자하니 어느 신학교 교수는 1학년 신학생들에게 대놓고 목회할 사람 뒤로가고 공부할 사람은 앞에 앉으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 지는 모른다.

신학교 교수들은 역사비평이니 문학비평이니.. 뭔 비평이니 하면서 성경을 난도질 한다. 그리고 그 난도질 한 후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 말하며 그것이 마치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처럼 말하며 군림을 한다.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의 왕이나 다름이 없다. 신학교 교수들에게 젊잖음은 있다. 신학교 교수들에겐 인격과 같은 도덕적인 품격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다. 겸손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도덕적인 인격은 또 다른 외식이다. 그들의 젊잖음은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을 뽐내기 위한 처신일 뿐이다.

어느 신학교의 교수가 겸손한가?

우리는 신학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다. 성경이 우리 믿음의 근본이다. 웨슬리는 성경, 전통, 체험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을 했다.

성경, 전통, 체험이 성령의 감동이며 복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세가지가 다르다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성은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긴 이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어던 의미에선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어적으론 그 이성이 웨슬리의 이성과 같다. 그래서 웨슬리의 이성을 오해하고 있다.

웨슬리의 이성은 이성주의의 철학이 아니다. 웨슬리의 이성은 합리주의 철학의 근본이 되는 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의 이성은 이성주의 철학과 다르다. 어떤 의미에선 이성주의 철학을 배격을 한다. 웨슬리의 이성은 합리주의 철학과도 다르다. 어떤 의미에선 합리주의 철학을 배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성주의와 웨슬리의 이성을 동일시 한다. 합리주의적 사고를 웨슬리의 이성적인 생각과 같은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하며 왜곡을 일으키기도 한다.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긴 이성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이성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회심)을 통해 회복된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전적인 의미로 이성을 이해해선 안된다. 웨슬리의 이성은 성경적인 이성이다. 웨슬리의 이성은 기독교 전통으로써의 이성이다. 웨슬리의 이성은 (성령)체험에 의해 회복된 이성인 것이다.

성령에 의해 회복된 이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인 정의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한다.

"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로 인해 타락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이성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는 이도 없으며 오히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못한 이들이 행한다는 선을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란 것이다.
회심하지 못한 이들이 말하는 도덕이나 윤리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그 또한 진정한 의와 선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속한 도덕이나 윤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는 이방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율법이다. 유대인에겐 모세의 율법이 있으며 이방인들에겐 양심의 가책에 따른 도덕과 윤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함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도덕과 윤리가 인간을 의롭게 함도 아니다. 다만 율법과 같이 도덕과 윤리는 인간의 타락을 알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이방인들은 도덕과 윤리로 죄를 깨닫게 될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몽학선생이라 부른다. 복음이 선포되기까지 죄인들을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율법이며 도덕과 윤리인 것이다. 그르므로 복음은 모세의 율법과 이방인들의 도덕과 윤리를 온전케 하며 복음을 통해 율법과 윤리와 도덕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복음-예수 그리스도)이자 은혜가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자 권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능력과 권세가 아니다 하늘의 능력이며 권세인 것이다.

여기에도 비유적 해석이 있다.
능력과 권세 그리고 인간과 율법, 도덕과 윤리, 선과 의 그리고 이성에 대한 비유적 해석말이다.

이 비유적 해석이란 세속적인 단어의 의미 이외의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권세는 세속적인 권세를 기본적으로 뜻한다. 그러나 이 권세에 대한 비유는 하늘의 권세가 된다. 그리고 그 하늘의 권세는 또 다시 세속적인 권세와 관계가 된다.

능력고 마찬가지이다. 능력 또한 세속적 의미적인 단어이다. 그러나 이 능력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며 이 하나님의 능력은 또 다시 세상의 능력과 관계가 됨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인으로서의 아담이다. 그러나 이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인간의 모습 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율법도 그와 같다. 율법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들이 만든 지배 이념이다. 그러나 이 율법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명령)이 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세상을 향한 율법이 되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명령(선행적인 은총)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이 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세속의 권력과 관계가 된다.

도덕과 윤리, 선과 의 그리고 이성도 그와 마찬 가지이다. 모든 단어는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세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는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의미)을 비유적으로 담고 있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단어와 관계가 됨으로써 들어야 할 말씀이 되는 것이다.

들려진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으로써의 들려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으로써의 들려지는 것(말씀)은 반드시 비유적인 것이 된다.

씨뿌리는 사람을 우리는 늘 보고 살아왔다. 그것은 보여지는 것으로 말한다면 단순히 씨뿌리는 농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듯이 보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씨뿌리는 자와 관계가 된다. 이것은 농부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아니다. 천국 백성들은 다 농부와 같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씨뿌리는 자의 비유적 모습속엔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천국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씨뿌리는 자의 모습 속에서 천국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이며 선지자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다. 선지잗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게 된 것일까? 이것이 하나님의 영에 의한 감동이다. 다르게 표현을 한다면 성령의 감동인 것이다.

누가 씨뿌리는 자의 이야기가 성경말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라 씨뿌리는 자의 이야기가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씨뿌리는 자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기 이전부터 천국의 이야기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을 것이다.

누가 과연 그러한 천국의 이야기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씨뿌리는 자의 모습 속에 있음을 보고 들었을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선지자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다만 예수님처럼 말씀(비유)으로 가르치지 않았을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이들을 통해 전달된 믿음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곧 복음이다. 곧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기독교의 복음이 바로 전통이다. 그리고 체험인 것이다.

이 체험으로 선지자들과 웨슬리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하는 것이 달랐고 말하는 것도 달랐다.

선지자들과 웨슬리가 권력을 말하였다 하자. 그러면 선지자와 웨슬리가 말하려는 권력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일까?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며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의 힘을 의미함인 것이다. 이것이 권력이란 세속적인 단어를 빌어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복음인 것이다.

선지자들과 웨슬리가 능력을 말하였다 하자. 그러면 선지자와 웨슬리가 말하려는 능력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일까? 이 또한 하나님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함이며 이것은 세속적인 능력으란 단어를 빌어 비유적으로 말하였던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복음이다.

선지자들과 웨슬리는 세속의 사람들과 같은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비유적으로 그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과 웨슬리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을 의미하는 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알아듣기가 힘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평범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인지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심지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아니 날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상한 사람이자 괴상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과거 선지자들의 말과 다르지 않음을 몰랐다. 그래서 당신이 모세보다 큰 자냐? 하고 묻기도 하고 네가 갖고 있는 그 권세는 어디에서 온 것이냐 따지기도 했고 네가 진짜 선지자냐? 묻기도 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알아 듣기에 어려웠을까? 그것은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혜롭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다.

후에 제자들도 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비유적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이를 박해 했던 사울 조차도 바울이라 이름을 바꿔 부르며 알아 들을 수 없는 비유적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때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때론 괴짜 사상가로 오해하기도 했다. 때론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이란 소리도 듣게 된 것이다.

왜 대체 이들은 그러한 말을 한 것일까?
왜 세상의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여 비유적으로 말을 하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령에 의해 감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심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으로 지혜로와 졌다.

학식이 없고 배움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 어떤 학식이 있는 이들의 말 문을 막히게 했으며 배움이 있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늘의 지혜를 통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사람들은 이상한 능력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러한 능력을 사도들은 성령의 은사라 하였다.
그리고 나는 말을 하고 싶다. 이들은 비유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지혜로와 졌다고 말이다.

이 비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이 바로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긴 이성이다.
이 이성은 성령의 감동으로 회복된 이성이다.
이 이성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갖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 겉모양(습)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비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으로 가득한 이성이자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참 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도 성경이다. 전통이다. 그리고 성령의 체험으로 회복된 이성인 것이다.
웨슬리에게 성경은 매우 이성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웨슬리에게 전통은 매우 이성적인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복음이었던 것이다.
웨슬리에게 체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산자의 하나님에 관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웨슬리에게 이성은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이상한 말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극히 너무도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복음을 이해하게 된 영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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