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언어를 통해 영적인 지식과 지혜를 깨닫게 될 것이니 말이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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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3 18:59:41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은 언제나 같이 간다.
영적인 타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늘 우리들의 삶과 인접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타락은 늘 인접해 존재하는 영적인 타락의 영향을 받아 현상(실)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인간의 삶 저편에 늘 인접해 존재하고 있는 영적인 타락으로부터 기인을 한다.
영적인 타락은 세속적인 타락의 씨앗과도 같다. 그리고 세속적인 타락은 영적 타락이 싹이나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될때 드러나게 되는 죄의 결과인 것이다.

세속의 종교는 세속적인 타락을 수정하려 한다.
인간의 죄성을 바로잡아 주려하는 것이다. 이 바로잡아 주려함이 교육이며 철학이 되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철학은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현사에 대한 관찰이며 고찰이자 정리인 것이다. 그래서 세속 종교는 철학을 동반한다. 노자 장자의 철학이 있으며 석가의 철학이 있고 공자의 철학이 있음이다.

영적인 종교는 영적인 타락을 수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 수정이란 말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수정이라 하기보단 회복이라 해야 할 것이며 이 회복은 인간 스스로에게 존재하는 그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의 결과물이 아님을 알기에 신(하나님)에 의한 전적인 은혜라 부르기도 한다.

영적인 타락은 신(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 영적인 타락은 수정되어 지는 것이다.
이 수정되어짐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며 더럽혀진 것을 깨끗히 씻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말이 바로 불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로 불려지는 것이다.

영적인 타락으로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다. 인간의 철학으로 본다면 성악설이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타락으로반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순수함 그 자체로 태어나기에 성선설이라 부른다.

인간의 육적인 세계에 인접하여 인간의 삶과 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영적인 세계를 부정한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의 그 순수함을 잃고 죄인으로 타락해 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반면 육적인 세계에 인접하여 인간의 삶과 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한다면 인간은 영적인 타락으로 인해 반드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어린 아이의 순수함으로 감춰져 있으나 운명적인 죄인으로써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절대적 타락)이라 할 것이다.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은 언뜻 듣기엔 그런가 싶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간다면 복잡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며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타락은 그 자체만으로 쉽게 관찰이되고 증명이 되니 이해가 쉽다. 그래서 법에 의해 판단을 하면 세속적인 타락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법적인 판단이 쉽지 않고 법적인 판단이 공정하지 못하여 쉽게 굽어질 수 있기에 때로는 법에 의한 판단 조차도 그 정의로움에는 많은 회의감을 갖게 된다.

여기 정의감, 공정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 또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먹이감이 된다. 이것이 진정 정의로운가? 이것이 진정 공정한가? 인간은 동물과 다르니 동물과 같이 생각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래 그러면 동물적인 행위로 보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공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또 무엇인가 말이다.

사람들은 공정이나 정의에 대하여 거창한 설명을 할 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그러한 일들이 인간사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되묻고 싶다. 판사의 판결이 정말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검사의 판단이 정말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그렇다면 변호사의 판단은 또 어떤가? 변호사의 판단이 정말로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난 100% 아니라 확신을 한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의 생각과 판단이 절대로 100%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확신을 한다. 왜냐? 판사도 검사도 그리고 변호사도 공정이란 말을 모르며 정의란 말의 진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법적인 판단은 증거물과 증인들의 증언에 따라 결정한다. 결국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의 생각과 판단이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증거물과 증언만이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공정이며 정의인 것이다.

증거와 증언,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증언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법정에선 증언보단 증거가 우선이다. 증거가 바로 공정이며 정의인 것이다.

칼이 바닥에 덜어져 있다. 이 칼은 무엇에 대한 증거일까?

요리사가 떨어트린 칼일 수도 있다. 강도가 떨어트린 칼일 수도 있고 지나가던 칼 장수가 떨어트린 칼일 수도 있으며 때에 따라선 누군가의 살인의 동기가 되는 칼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칼에는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있으며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숨겨진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비밀)인 것이다.

칼이 길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이라 할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매우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칼이 될수도 있음이다. 우연과 필연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혀진다.

사람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연히 만났다 할 것이다.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말을 한다.
무엇이 진실일까? 무엇이 이 만남의 원인이 되며 무엇이 이 만남의 이면에 감춰진 진짜 이야기(비밀)일까?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
영적인 타락은 세속적인 타락에 대한 숨겨진(감춰진) 이야기인 샘이다. 그래서 씨앗이다.
세속적인 타락은 감춰져 있던 영적인 타락에 의해 드러난 결과인 샘이다. 그래서 열매이다.

열매와 씨앗은 무엇인가?
단어적으론 전혀 다른 의미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이다.
열매가 씨앗이고 씨앗이 열매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면 농부에게 가서 물어보라.
볍씨는 무엇이며 벼는 또 무엇인가 말이다.

씨앗(영적인 타락) 속에 열매(세속적인 타락)가 있다.
또한 열매 속엔 씨앗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타락과 세속적인 타락은 서로 다름인 것 같지만 하나이다.
영적인 타락속에 세속적인 타락이 있으며 세속적인 타락이 곧 영적인 타락인 것이다.

간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음탕한 생각이 간음인가? 아니다. 법적으론 육체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간음인 것이다.

그러나 영으로 말을 한다면 음탕한 생각이 곧 간음인 것이다. 간음이란 육체적 행위 속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 숨겨진 이야기는 간음을 해야만 했던 경유(필연적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 그 사람은 간음을 했을까?
이미 그 사람은 영적인 간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간음이 왜 있었는가? 그것은 인간의 육체는 간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간음을 한적이 없다고 항변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육적인 간음이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 관계인 간음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그 욕망이 이미 간음인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영적인 스승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욕망이 왜 간음인지 말이다. 영적인 스승은 드러난 육체적인 타락에 대하여 감춰진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감춰진 이야기가 비밀이며 영적인 지식이자 지혜가 된다.

목사는 그런 스승이다.
감춰진 영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혜를 가르치는 자가 바로 목사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 스승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스승이다.
모든 영적인 가르침은 예수님으로 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적인 스승(지식, 지혜)으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라.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고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비유가 바로 영적인 지식이자 지혜인 것이다. 이 영적인 지식과 지혜는 영적인 타락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타락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일들을 비유로 하며 영적인 지식과 지혜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적인 지식과 지혜들을 비유에 담아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 가르치셨다.

영적인 비유(씨앗)는 상징이며 은유이다.
육적인 세상의 이야기(열매)는 또 다시 상징과 은유를 통한 비유적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비유는 육체의 일이자 영적인 이야기이다. 또한 영적인 일이자 육체의 이야기인 것이다.
비유를 통해 따로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듯한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는 감동이다. 하늘의 진실을 담은 감동이니 이것을 성령의 감동이라 비유하는 것이다.

신앙(영)의 언어는 대부분 비유적인 단어들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엔 신앙(영)의 언어를 담고 있는 비유적인 말들이다.
신앙(믿음)은 종교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종교를 뛰어넘는 영을 의미한다.
영은 신앙(믿음)의 언어를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이 되는 데 이것을 믿음(신앙)이라 한다.

영과 육은 동전의 양면이다.
영과 육은 인접한 또 다른 세상 같지만 실상은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이 하나됨의 언어가 신앙(믿음)의 언어이며 이 믿음(신앙)의 언어가 바로 비유인 것이다.

공정, 정의?
이것은 비유이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에 대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적인 말이기도 한다.

세상은 이미 공정하다. 세상은 이미 정의롭다.
다만 그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바라보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생각과 판단이 있음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 말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할 뿐이다.

믿음은 이 욕망적인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공정하지 않지만 공정하다 믿는 것이며 때론 정의롭지 못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정의롭다 믿는 것이다.

아니 공정하지 않은데 어찌 공정하다 믿을 수 있는가?
아니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데 어찌 정의롭다 믿을 수 있는 가 말이다.
우리 한번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어디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구하는 이들에게 영의 언어는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을 한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고 행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또 말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정한데.... 하나님이 진짜 있다면 어찌 이렇게 불공정할 수 있는가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데... 하나님이 진짜 있다면 어찌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방치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욕망에 사로잡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싶어(욕망)하는 육체에 속한 이들에게 영적인 스승이었던 선지자들(예수님, 세례요한 등등)은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하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나는 이 비유의 말씀을 또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하고 싶다.
"진실로 회개하라. 그러면 비유의 언어를 통해 영적인 지식과 지혜를 깨닫게 될 것이며 이 깨달음은 육체의 지혜가 될것이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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