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을 이용한 음모

최세창
  • 1842
  • 2018-06-26 21:37:30
1. 시작하는 말

용서는 미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철부지가 도둑질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바늘을 훔쳤을 때 흔히 말하는 용서를 하지 않고, 따끔하게 꾸짖거나 벌을 준다면 소도둑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용서하다’로 번역된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의 뜻은 ‘은혜를 베풀다’, ‘유익하게 하다’입니다. 죄인에게 은혜가 되게 하거나 유익하게 하는 것이 카리조마이 곧 용서입니다. 죄인에게 유익하거나 은혜가 되는 것은 묵과나 덮는 것일 수도 있고, 책망이나 징벌이나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분별없는 용서는 죄의식을 없애기도 하고, 죄를 조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미덕이나 용서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2. 간음한 여인을 이용한 음모를 꾸민 자들과 예수님

예수님이 감람산에 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셨는데, 백성이 나아오므로 앉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 교권자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법대로 쳐죽이지 않고,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습니다. 서기관들은 바벨론 포로 후기의 율법의 전문적 해설자요 교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최고 기관인 공회 곧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었고, 대제사장과 그 가족들 다음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행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지도층이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여 통치하는 영광의 메시아관을 가진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주제에 메시아 행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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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받는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사기꾼으로 여겼습니다. 혹세무민하는 메시아 사칭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가운데 세운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기도로 성부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시간을 보내신 후, 성전에 오셔서 모여든 군중에게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 뒤에 함정에 빠뜨릴 거리인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교권자들과, 그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살기등등한 민중과 간음죄를 저지르고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간음한 여인이 한 자리에 모인,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실행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교권자들이 제거할 예수님을 보고, “선생이여”라고 부른 것처럼, 음모는 존경심으로 위장되곤 합니다. 그 위선자들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는데, 복선이 깔린 아주 교활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하시면 합법적인 처리요 민심을 쫓는 것이지만, 네 가지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첫째, 죄의 종인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로서 사랑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위선자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둘째,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의 사함과 성결한 삶과 영생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행보에 치명타가 될 것입니다. 셋째,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고발될 것입니다. 반즈(A. Barnes)는 “로마인들에게 속한 권리, 즉 생사권을 주장했다고 고발할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넷째,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 교사죄입니다.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된 그 교권자들은 자존심도 없이, 점령하여 통치하는 로마의 법을 이용해서 왕 중 왕이신 주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시면 네 가지의 함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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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게 됩니다. 첫째, 모든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는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받을 처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율법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므로 예수님을 범법자로 혐오하거나 배척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가 율법의 금령인 간음죄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들을 것입니다. 넷째, 메시아라는 자가 순결이 아닌 음란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들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시면,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스스로 장벽을 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권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 자체는 아주 쉽게 이해되는데, 그런 이해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교권자들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들을 간파해야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대개 말이나 글이란 표현된 의미를 이해했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가진 표현의 취지인 속뜻을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권자들이 여러 가지의 복선을 깔고 자신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 교활하게 시험하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하시지도 않고, 용서하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얼른 대답을 못하시는 것으로 안 교권자들은 의기양양해서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목적이 달성된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정말 지도자답지 못한 행짜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묵묵부답은 교권자들이 쾌재를 부르면서 대답하라고 채근할 기회가 아니라, 깨닫고 회개할 기회가 아닙니까? 그들 식으로 말하면, 간음한 여인을 쳐죽이지 않고, 끌고 온 것부터가 불법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헨리(M. Henry)와 웨슬리(J. Wesley)는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은 여인의 죽어 마땅한 간음죄에 대해 증인이 되라는 것이라고 주석했습니다. 호스킨스(Hoskyns)는 “예수님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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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기한 유일한 문제는 죄인인 주제에 남녀 인간을 다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행동할 수 있는가 함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죄가 없으신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근본적인 문제, 즉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대답은 교권자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살기등등해서 손에 돌을 들고 지켜보던 민중도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일 자격이 있다는 자기 의에 빠졌던 유대 무리의 양심을 뒤흔든 천둥이었습니다. 오만한 자기 의이자 율법의 의에 도취된 교권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사람이란 같은 권력자들과 함께할 때나, 소위 잘난 사람들과 함께할 때나, 민중과 함께할 때는 자기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합의 하에 만들어진 법이나, 공권력에 의한 보상과 징벌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0:4을 보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취지는 개인의 언행이든 공권력 행사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 하신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또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나갔습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과 그녀의 죄가 남은 것입니다. 무언중에 죄가 있다고 시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들 역시 떠나갈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앞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 세상에 주 예수님 앞에 서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간음한 여인만 남아 있는 것을 보시고,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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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으셨고,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은 살기등등하던 교권자들과 민중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정죄한”의 헬라어 카테크리넨(κατέκρινεν)은 ‘심판하다’, ‘유죄 판결을 내리다’,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판단하다’를 의미합니다.
정죄한 자가 없다는 여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결정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닙니다. 죄인에게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마땅히 정죄받을 죄를 범했지만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죄란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고, 결국엔 죽음과 멸망으로 몰아가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목적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란 여기까지입니다. 저지른 죄와 죄의 위력을 알게 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4. 맺음말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유익과 은혜가 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을 정죄하거나 이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정죄할 만큼 무죄한 사람은 없습니다. 법적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남을 정죄할 만큼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더 크고 많은 죄악과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징계와 채찍이 필요한 용서의 경우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해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죄인에 대해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마-계)/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EL.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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