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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끌어 내리기 위한 불장난
관리자
- 1559
- 2018-06-26 21:34:21
내용은 비록 짭지만 많은 것을 주고 받았던 의미있는 대화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그 대화를 통해 성모 목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일 전에 있었던 선거무효소송에 대한 취하서를 읽고 내가 봤었던 어렴풋함이 어렴풋함이 아니라 이젠 선명함으로 다가와 보였다.그 선명함이 무엇인지 쓰려한다.
이 글은 성모 목사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을 주기 위한 글이 아니다. 한 개인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감리교회의 공익이 있기 때문이며 성모 목사에 의해 행해진 선거무효소송에 대한 취하가 성모 목사 자신이 내게 보였던 그 말들에 대하여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행위였는 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글은 성모 목사가 고소취하의 이유를 당당과 KMC뉴스를 통해 감리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음으로 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바로 잡으려 함 일 뿐이다.
성모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목사님 식으로 감리교회를 사랑하고 지키세요. 그렇게라도 하는 분들이 있어야죠. 구경꾼보다야 훨 낫죠."
감독회장 선거무효 소송이 성모 목사 스스로도 감리교회를 위하고 지키려 함이라 한 것이었다. 그 방법은 나와 다른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모 목사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실 분이십니다. 그 초가삼간이 남의 집이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자신의 집이라면 어찌 하실라고 그러십니까?"
내가 볼때 성모 목사의 선거무효 소송은 감리교회를 도 다시 불태워 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로 보였었다. 또 다시 감독회장의 일로 10여년 전에 있었던 사회법의 혼란을 재현 할 수도 있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성모 목사는 내게 이렇게 답을 하였었다.
" 저도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소송입니다. 운명처럼. 저는 성경적으로 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않습니다. 그런 말로 너무 형편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요."
"그런 말씀이 공명심입니다. 주님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하셨습니다."
"목사님, 그만 합시다. 공명심이라고 하세요. 교만이라고 하시고. 마음대로 평가하세요. (고린도전서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당시에 성모 목사는 공명심으로 선거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했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남의 판단과 평가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겠노란 담대함도 보였었다.
성모 목사는 나에게 또 다시 말을 했다.
"저는 최소한 제 양심에 비추어 일관성있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양심,
그래 선거무효소송이 성모 목사의 양심이라는 것이다. 그 양심에 따른 행동이 바로 감독회장 선거무효에 대한 소송이라 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 양심은 어디로 갔는가? 그 양심이 변질되었던가? 아니면 그때의 양심적인 판단은 잘못 되었다는 것일까?
나는 소송취하를 하고 전명구 목사와 손을 맞잡은 성모목사에게 이 양심에 대하여 다시 묻고 싶다.
"대체 양심은 왜 변하는 것입니까? 대체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진정 양심의 따른 운명적으로 끌려들어간 소송이었단 말입니까?"
지난 과거이니 분명 성모 목사에겐 운명이란 단어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운명은 양심을 변하게 하였을까? 가룟인 유다도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자신의 양심에 의해 스스로 제자의 길을 택하였던 가룟인 유다는 자신의 양심의 양심을 따라 은30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것을 우리는 배신(반)이라 부른다. 양심은 배반이 아니다. 양심은 한결같음이다.
목사에겐 양심이 매우 중요하다. 양심은 우리를 스스로 참된 목사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목사로 하여금 온전히 목사의 길을 걷게 하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의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양심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목회의 현장에 나왔으며 지금까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목회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들에게 비양심적인 모습을 많이도 보게된다. 그 비양심적이란 것은 외식이다.
성모 목사의 모습 속에서도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신 스스로가 양심적인 운명적 선거무효 소송이라 하였었다. 그런데 이젠 그 양심적인 선거무효 소송을 포기해야 하겠단다. 왜냐하면 그것이 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한 보다 크고 넓은 대승적인 차원으로서의 결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성모 목사의 그 변심이 야합이라 하였고 담함이라 하였다. 그랬더니 몇 몇분들이 뭐가 그게 야합이고 담합이냐라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그래 보는 입장에 따라선 야합이 아니라 오히려 양심적인 행동이자 감리교회를 위한 결단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하고 십보 아니 백보 양보해서 성모목사의 결단이 야합이 아니라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 양심적인 행동일까? 그것이 진정 감리교회의 개혁일까?
난 확신을 한다.
목사의 양심적인 행동은 때론 감리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의 변심은 양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변질이고 배반이며 배신이다. 최소한 자기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고 변절한 그 대승적인 결단이 진정 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마음이 못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절대로 그건 아니라 생각을 한다. 몰론 이건 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절대로란 말이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판단이 틀렸다면 성모 목사 스스로 나서 변증을 하던지 아니면 누군가가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진실(리)에 목마름이 있는 자이니 말이다.
어쨌든 내가 볼 때 성모 목사의 소송취하는 야합은 아니라 하여도 변질이며 변심이자 배신이라 생각을 한다.
"전 불태워지는 초감삼간이라도 지키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집이고 내 교회이고 내 감리교회이니간요."
나는 그날 성모 목사에게 성모 목사의 그 명예욕에 의해 시작된 선거무효가 감리교회를 지키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불태워질 것이라 염려를 했었다. 그리곤 불태워질 감리교회를 지킬 것이라 다짐을 하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성모 목사는 내게 이렇게 답을 했다.
"불태워지기 전에 썩어서 무너질 겁니다. 엶심히 지키세요."라고 말이다.
글쎄 내가 성모 목사의 선거무효소송에 대하여 비판을 하며 감리교회를 지키려 했던 것이 감리교회를 섞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확신을 한다. 성모 목사의 선거무효소송은 감리교회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리교회를 불태우려는 염려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젠 성모 목사의 선거무효소송을 취하한 것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행한 또 다른 감리회에 불장난이라고 말이다. 이 불장난은 스스로 자신의 양심적 행위라 했었던 것에 대한 배반이며 배신이며 변심이자 야합과도 같은 못된 행위인 것이다.
지난 선거무효 소송이 전명구 목사를 끌어 내리기 위한 불장난이었다면 이젠 이철 직무대리를 끌어 내리기 위한 불장난이다. 대상은 달라졌지만 누군가를 끌어 내리기 위한 불장난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비양심적인 태도이며 무책임한 책임회피이자 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하심을 목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