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유민(流民)

함창석
  • 1111
  • 2018-06-26 03:21:10
유민(流民)

산돌 함창석 장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전부터 다양한 무리가 끊임없이 유입됐다. 토착민들은 새로운 기술을 갖춘 유이민들과 협력해 국가를 건설했다. 신라에서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을 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특히 3대 시조 중 하나인 석탈해 설화는 이런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드러내고 있다. 다파나국에서 함달파왕의 아들로 태어난 석탈해가 한반도 외부에서 왔다는 점은 “왜국의 동북쪽 1000리”라는 점에서 확실하다. 학계에선 러시아 오호츠크해 연안에 까치설화가 전해오는 캄차카 반도를 꼽고 있다.

외부 세력이 들어올 때 환영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더 상세하게 전해준다. 석탈해가 금관가야에 나타나 김수로왕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김수로왕이 거절하자 술법 대결까지 벌였다가 패배한 석탈해가 신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때 "김수로왕이 석탈해를 쫓아가려고 군선 500척을 띄웠다"는 것을 보면 석탈해가 꽤 많은 무리를 데리고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텃세를 과시한 김수로 역시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과 결혼해 나라를 세웠다. 허황옥 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도마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헬라 이름은 ‘디두모’이다. 주님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복음의 열정이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도마가 영생의 처소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도마는 눈으로 보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정도로 의심 많고 믿음이 부족했었다. 전승에 의하면 후에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전해진다(Eusebius).

허왕옥은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신라 헌강왕 5년에 왕이 개운포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가 동해용과 일곱 아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명이 왕을 따라와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곧 처용이었다. 왕은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 벼슬을 내렸다.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여 밤에 몰래 들어가 동침했는데 밤늦게 돌아와 이를 발견한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에 역신이 처용 앞에 꿇어앉아 잘못을 빌고 그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아비틴은 중국 당나라로 망명해 저항세력을 이끌었다. 당나라마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아비틴은 고민에 빠진다. 이때 한 서역 지역의 왕이 “바실라(신라)는 파라다이스처럼 아름다운 곳이며,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며 추천 편지와 함께 신라로 가는 뱃길을 알려줬다. 신라를 찾아간 아비틴 일행은 신라왕 타르후르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 아비틴은 신라 왕자 가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고,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아들 파리둔도 얻게 된다. 이란에 전해져 내려온 중세 서사시 『쿠쉬나메』의 주요 내용이다.

8세기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인도 여행을 하며 남긴 기록물이 왕오천축국전이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로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이다.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고구려 유민이 사막곡(沙漠曲)으로 많이 유입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험난하기로 이름난 힌두쿠시 준령을 넘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한 후,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간의 제휴를 단절시켰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라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전 김정효 2018-06-25 사라질 뻔한 지워질 뻔한 사실이...살아나 다행
다음 김연기 2018-06-26 제134회 늘푸른아카데미 특강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