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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한 감리회 정신차려라.....탁사 최병헌 선생
도현종
- 1803
- 2018-06-25 20:51:10
(탁사 : 어지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하다)
동양과 서양의 하늘은 걑다. 돌이킴이 없이는 망함이다. <요나 3장4-10절>
최병헌은 1858년 세도정치가 한창인 조선후기 충북 제천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너난다. 그는 무너진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30여회에 걸쳐 과거시험에 응시하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실력으로 합격하기는 어려웠었다.
최병헌은 폐쇄적으로 굳어버린 유교사회인 조선왕조의 몰락 앞에 새로운 길(道)을 찾게 되는데 그 때 개화사상에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급진파도 김윤식, 유길준과 같은 온건파의 입장도 아니었다.
소수의 정치운동을 넘어 민중의 자각을 호소하는 종교 운동이 일어나길 꿈꿨다.
최병헌, 아펜젤러를 만나다
최병헌은 1880년 중국 상해에서 들어온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통하여 기독교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 후 정동에 있는 선교사를 찾아가는데 그때가 1888년이었고 그가 만난 이가 아펜젤러선교사였다. 그는 당장에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아펜젤러에게 성경을 한 권 얻어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을 연구하고 고심한 끝에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1893년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 후 5년의 시간동안 종교철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으며 존스선교사의 어학선생이 되면서 계속 기독교를 가까이 했다. 1889년에는 배재학당에서 한문선생으로 있으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도 동참하였다. 그렇게 점차 신앙이 깊어져가던 그는 1902년 5월 18일 목사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 불과 얼마 후 선교사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차 목포로 가던 아펜젤러가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배가 파선해 순직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아펜젤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탁사 최병헌은 1903년 정동제일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종로선교의 문과 중앙대학교의 씨앗
최병헌은 정동제일교회로 오기 전 향정동 집을 예배당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는데 이 교회가 오늘날 인사동 중앙교회의 시작이었다. 그가 정동제일교회로 부임해 간 후 중앙교회는 1910년 독립교회로 성장하며 1916년에는 교회 부속 중앙유치원을 설립했고 1918년 중앙유치원으로 독립한 후 태화, 경성 등 유치원들이 생겨나면서 중앙유치원에서 교사 양성을 위한 유치원사범과를 설립하였는데(1922) 이것이 1920년대 신간회 등의 사회운동으로 중앙보육학교로 발전했고 오늘날 중앙대학교의 모체가 된 것이다. 중앙보육학교를 이끌다 중앙대학교를 세웠다고 알려진 임영신 박사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만난 선교사에게 부모님의 반대가 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부탁하여 전주 기전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그 곳에서 항일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했고 전주 3.1운동 때 옥고를 치르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열정어린 마음과 애국의 마음은 날로 쌓여만 갔다. 그녀가 미국에서 교육을 마치고 흑석동 땅 20만평을 구입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 보육학교를 인수하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이념을 펼치며 교육에 열정을 다해 오늘날 중앙대학교의 토대를 다졌던 것이다.
최병헌, 애국가의 실질적 작사가
우리나라 애국가는 작사자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아리랑처럼 민요로 불려왔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애국가 작사에 최병헌선생이 지었다. 우리나라 애국가의 유래는 대한제국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고종황제는 미국과의 조미수호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울려지는 미국의 음악들을 보면서 우리는 국가 행사에 연주할 곡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독일인 에케르트를 통해 애국가를 짓게 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애국가의 시작인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고 곧 이어 우리를 지배한 일본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 결국 이 곡은 우리 민족에게 잘 전파되지 못한다. 그 후 대한민국의 국가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인 ‘올드랭 사인’이라는 음에 맞추어 불렸는데 이를 안익태선생이 작곡을 하여 붙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객관적이고 완벽한 증빙자료가 없다하여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린바 있다.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당시 민영환, 최병헌, 안창호, 윤치호, 김인식 등이 작사자로 거론된 바 있는데 최병헌 목사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확률이 높다. 이것이 불변가이다.
장손녀인 최규애씨의 말을 들어보자.
“어린 시절 천연동 자택에서 조부 최목사와 지내던 때에 많은 문객들이 방문하였고, 매달 시회(時會)가 열리면 ‘올드랭 사인’곡의 애국가를 자주 불렀는데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애국가 원형은 할아버지가 지으신 불변가다. 후렴은 윤치호 선생의 황실가 후렴이 좋아서 첨부했다”고 하시며 애국가 4절 원문을 조부 최병헌 목사가 지으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정동교회 목사로 계시던 시절, 이승만, 신흥우, 김규식등 배재학당 출신 13명과 ‘바보클럽’이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매주 1회 만나셨는데 회원들이 해외로 망명할 때 불변가를 적어서 주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 불변가가 오늘날 애국가임을 확신합니다.“ 이런 증언들에 덧붙여서 최병헌 목사 저작설이 더 큰 힘을 받는 것은 지금은 고층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옛날 정동교회 목사 사택에서 남산을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여, 애국가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구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심광섭. 탁사 최병헌의 유교적 기독교 신학. <세계와 신학>글 중에서
기독교 대한 감리회 탄식
기독교 대한 감리회 이런 스승을 두고 회장 선거 장난에 결국 매진한다. 애국가가 감리교회 정신이다. 이런 엄숙한 기상을두고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교회를 이끌고간다. 탁사 선생이나 김산 선생이 언제 회장 선거가 감리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가르치셨는가? 예수가 모진 십자가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 하시면서 선거하라 하셨는가? 아니다 나라를 구원하기위해 대한매일신보에 "남대문안 시장 한 구석에 몇칸 반터를 한성부에 청원하여 점포를 설치하고 몇 사람을 살리려 하였더니 관원이 허락 하지않고 공용으로 쓰겠다 하더니 일본 사람이 그 터에 이층집을 짓고 점포를 시작 하더이다. 이 벼슬아치 그들에게는 후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야박하게하는가?" 복음은 살림이다. 살려서 모신다는 뜻이다. 감독 회장자리 하고서 감리회 살려내는 분들 거의 보질 못했다. 살림이 예수이다. 이대로가면 분명 주저않는다. 중앙대 잊어버린것도 모자라 감리회 전체를 잊어버리시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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