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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김산 선생(2)
도현종
- 1252
- 2018-06-29 01:42:47
대체적으로 역사의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삶은 일반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산 것은 틀림이 없다.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어렵고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인물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풍부한 물질로 인해 육체적인 어려움 없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예들 들어, Immanuel Kant (1724-1804)]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적인 인물은 자신의 어려운 삶의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한 인물이었다. 그들이 처한 지옥 같은 환경을 옥토로 바꾸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는 큰 상상을 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김산(本名 : 張志樂)’이라는 인물도 같았을 것이라 추측을 해본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통해 그의 삶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요약을 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는 배움을 통해서 행동으로 몸소 실천을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산은 그렇지 않았다. 행동으로 실천하기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본과 중국으로 가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성서 의학과 중국어와 일본어, 톨스토이의 작품과 마르크스이론, 기독교 신앙, 철학서(헤겔의 변증법)를 통해서 혁명가로서의 삶(광둥과 하이루펑의 전쟁 - 중국대혁명, 만주에서 조선독립 투쟁)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김산의 삶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자신이 이루고자 한 일에 대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님 웨일즈가 김산을 표현한 단락을 보면 명확해 질 것이다.
김산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대변동 속으로 내던져진 한명의 민감한 지식인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시인이요, 작가였다.
두 번째로, 진정한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그것을 통해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고 책은 전하고 있다. 김산은 상하이에서 이동휘 장군(군인으로서의 삶), 안창호 선생(정치적면)과 무정부주의자들, 박진부부와 그의 동생들, 김약산(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함)과 오성륜(정열적인 사람으로 비밀리에 행동하며 묵은 된장 맛이 나는 친구)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통한 진정한 만남이 없이는 이루어 질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김산은 인간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고 진술을 하고 있다. 다시 한번 님 웨일즈의 표현을 빌려보자.
내가 묻는 것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낭비인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쓸데없는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가 하는 것이다.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결과적인 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인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다. 사람들은 실험을 통하여 비로소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실험은 사람들의 안전장치이며 권리이다. 배우지 않는 자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잉크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피와 고통으로 쓰여 진 것들이다. 사람들을 죽음과 실패로 이끌기는 쉽다. 그러나 승리로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 번째로 감리교회의 진실한 회복이다. 1936년,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황량한 벌판에서 별을 보게 된다. 그 별은 이미 해가 져 어두워진 중국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던 당대 중국 인민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고 빛나는, 미래에 대한 등불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을보고 하나님의 꿈을 회복하였던것처럼
미국 중부의 켄사스 시티에서 1905년 태어난 에드가 스노우는 스물 세 살의 나이로 중국을 갔다가, 이미 반은 서구 열강의 침탈로 말미암아 식민지가 되어버린 중국의 어지러운 현실에 깊은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된다.
그의 부인이었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 다른 이름으로는 님 웨일즈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그녀가 당시 감리회 독립 혁명가 김산과 1937년 만나 “아리랑의 노래”를 썼던 것은 이렇게 보면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두 젊은 벽안(碧眼)의 부부가 아시아의 고난에 나름대로 참여했던 셈이다.
그렇게 중국과 인연을 맺었던 에드가 스노우는 이후 손문의 부인이자 중국 대모의 위치를 갖게 된 송경령의 편지를 들고, 장개석 군대에 쫓겨 패잔병처럼 되어버린 모택동의 홍군 주둔 지역으로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패잔병들의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정을 가진 젊은 전사들의 인간미와 위엄이다.
송경령 자매들, 중국 역사에서 대단한 자국을 남긴 감리회의 여걸들이다. 큰 언니 송애령은 대부호의 아내로 중국의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둘째 송경령은 아버지의 친구인 손문의 부인이 되었으며, 막내 송미령은 장개석의 부인으로 중국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감리교회의 진정한 사랑이다.
중국과 대만을 예수 사랑 감리회 정신으로 뒤바꾼 기걸찬 선배들앞에 감독회장 선거로 감리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우리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물어야한다.
성서의 무게를 가진 송경령의 서한을 들고 간 에드가 스노우는 당시 대장정의 과정으로 민심을 끌어 모으고 있던 중국 지도부와 깊은 교감을 나누면서 중국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미국의 젊은 언론인이 증언한 오늘날 중국의 출발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처참한 패퇴와 강력한 봉쇄정책으로 밀리고 밀려 있던 이들 중국의 전사들은 결코 조급하지 않은 긴 안목과 역사에 대한 낙관, 그리고 중국 백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로 새로운 중국을 마침내 태어나게 한다.
‘김산’의 삶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작고 조용한 혁명가로서의 삶을 추구한 그는 진정한 독립투사이자,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위대한 민족의 스승이자, 감리회의 지도자였다. 이분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남기고 간 발자취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