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의 예수의 기도(마 26:36-46)

최세창
  • 1855
  • 2018-07-03 21:01:07
제자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에 관해 기록해 온(26:31-35) 마태는, 이제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마가복음 14:32-42과 누가복음 22:39-46①과 요한복음 18:1-2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는 이 기사를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로 시작한다.
유월절 식사 때, 성찬식을 제정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다.
“겟세마네”(Γεθσημανή)는 문자적으로 ‘착유기’, ‘기름 짜는 틀’을 뜻한다. 이 동산은 기드론 시내② 건너편(요 18:1) ‘감람산’(21:1의 주석을 보라.) 기슭(눅 22:39)의 어떤 곳이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
“곳”은 코리온(χωρίον)이며 ‘장소’, ‘공한지’, ‘지역’, ‘토지’, ‘정원’, ‘장원’, ‘밭’ 등을 의미한다.
{요세푸스(Josephus)는 이러한 동산이 예루살렘 주변에 여러 곳이 있었다고 한다.③ 바클레이(W. Barclay)는 “예루살렘은 너무나 번잡하였고, 또 거룩한 성안의 땅을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비료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율법이 있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감람산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막 14:32의 주석). 누군가 돈 많은 사람이 밤에 정원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동산 곧 정원의 주인이 예수님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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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저자의 마가복음 14:32-42의 주석과 누가복음 22:39-46의 주석을 보라.
2) 저자의 요한복음 18:1의 주석을 보라.
3) in E. Bickerst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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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였는지도 모른다”(A. Barnes, “Meyer”,④ 이상근).}(요 18:1의 주석).
아무튼, 이 감람산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습관적으로 찾으시던 장소였으며(눅 22:39), 이것을 잘 아는 가룟 유다(요 18:2)는 머지않아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이 곳으로 온다.
참혹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겟세마네에 이르신 예수님은, {“인간과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필요로 하셨다.······괴로움이 있을 때는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반드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의 예수님이 그런 상태이셨다”(W. Barclay).}(막 14:32의 주석). 그러나, 인간은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 점은 조금 전만 해도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던 제자들이 단 한 시간도 그분을 위해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으로도 분명해진다(40, 4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기 가서 ‘기도할’(프로슈속마이, προσεύξωμαι: 5:44의 주석을 보라.)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하셨다. 인생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자신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있다(갈 6:5). 우리는 그 짐이 아무리 무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하실 곳으로 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셨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10:2의 주석을 보라.
“고민하고”(뤼페이스타이, λυπείσθαι)는 14:9의 주석을 보라.
“슬퍼하사”는 아데모네인(ἀδημονείν)이며 “마음이 무겁다”(A. Barnes),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다”(R. C. H. Lenski)를 의미한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대적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혹은 올 준비를 하고 있음을―아셨고,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 산헤드린의 정죄와 빌라도의 선고, 군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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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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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한 못박힘 등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인은 가장 부드럽고 예민한 심령을 가지신 예수께서 점점 혼자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일은 십자가 상에서 자신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 15:34)라고 울부짖으리라는 것이다.”}(막 14:33의 주석).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자신에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하나님의 진노의 파도를 보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마태는 【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마음”(프쉬케, ψυχή)은 6:25의 “목숨”의 주석을 보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는 죽을 지경인 극도의 비탄 상태를 토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비탄을 토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릴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는(갈 3: 13) 대속 죽음(20:28, 막 10:45)에 대한 고뇌를 토로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심적 고통에 동참하고, 제자들 자신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눅 22: 40)는 뜻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독대하여 드린 절실한 기도에 대해, 마태는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였다.
“조금 나아가사”는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측근인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41에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라고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 동료들을 떠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잘 알려져 있다(창 22: 5, 출 19:3, 렘 15:17).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는 지극히 겸손하게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창 17:3, 17. 참조: 막 14:35, 눅 17:16).
“내 아버지”는 3:17의 주석을 보라.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20:22의 주석을 보라.)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꾸실 수 있다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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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즉,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도로 인류를 구속하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다.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는 감연히 육체적 유혹과 연약을 극복하신 것이다”(이상근).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섭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결사적인 영혼의 기도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라고 하였다.
일단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시간에 경고를 받은 후의 제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돌아와 보셨다. 그런데 제자들 중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슬픔과 고독과 적막과 허탈 등으로 착잡하셨을 것이다.
그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셨다. 구주이자 스승이 걷는 수난의 길에 동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그들에게 닥쳐 올 시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을 가볍게 나무라시는 것이다.
세 제자 모두, 특히 베드로는 제일 먼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26:35, 막 14:31, 눅 22:33, 요 13:37), 깨어 있으라(38절)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시간에 자고 말았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기도했다면, 그들은 깨어 있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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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것이다(W. Hendriksen).}(막 14:37의 주석).
또다시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 마태는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하였다.
“시험”(페이라스몬, πειρασμόν: 4:1의 주석을 보라.) 곧 예수님을 버리거나(26:33, 막 14:29) 부인하는(26:34, 막 14:30-31) 죄를 범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은 길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 자신의 인성에 의한 연약함을 경험하셨으며, 따라서 기도가 필요하셨다면, 제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훨씬 더 기도가 필요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막 14:38의 주석).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 “마음(프뉴마, πνεύμα: 5:3의 “심령”의 주석을 보라.)에는 원이로되 ‘육신’(사룩스, σὰρξ: 육체)이 약하도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육체의 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셔서 기도하지 않고 자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고 육체에 매여 있는 상태를 가볍게 나무라시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육체의 약함을 극복할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에 대해, 마태는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라고 하였다.
첫 번째 기도보다 다소 진전된 기도이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43】“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라고 하였다.
“피곤함일러라”는 베바레메노이(βεβαρημένοι)이며 ‘무겁게 누르다’를 의미한다.
이 묘사는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눌러 잠든 것을 나타낸 것이다. 육신으로서의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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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본격적인 실패에 앞서 이미 실패한 것이다. 닥칠 큰 시험에 들지 않을 힘을 얻는 기도의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45절).
제자들이 자는 반면에, 사단의 도구가 된 가룟 유다는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다(4-46절).
예수님의 세 번째 동일한 기도에 대해, 마태는 【44】“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라고 하였다.
세 번째 동일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라고 하였다.
“이제는 자고 쉬라”는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무리가 눈앞에 다가선 마당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거나, 제자들 자신이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할 기회가 없어졌으므로 자고 쉬라는 것이다.
“보라(10:16의 주석을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는 본격적인 고난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인자가 ‘죄인’(χείρας ἁμαρτωλών: 복수형)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는 가룟 유다와 그를 따라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무리(26:47)에게 체포된다는 뜻이다.
결론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태는【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하였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함께 도망가자는 것도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마쳤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해 같이 전진하자는 것이다.
“보라”(10:16의 주석을 보라.)는 팔리는 일, 즉 넘겨지는 일이 곧 벌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거듭 예고했던 일들이 이제 막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무리를 안내해 오는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의 극악무도함은 스승을 죄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데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의 예고에 따라 사건들이 일어난다”(J. Gnilka, 하권, p. 348). 특히, 마경일 님은 “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 반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여도 복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의 연약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다와 같이 하나님에의 반역 행위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는 십자가의 사유 권외에 있는 자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실상 십자가의 사유 권외에 있는 자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은 없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즉, 회개하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참조: 3:29).}(막 14:42의 주석).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67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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