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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충성한 세 용사
최세창
- 1788
- 2018-07-11 20:14:39
통치자인 왕은 국민의 안녕과 복지, 자유와 인권과 국력의 신장을 위해 충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신하에게 충성을 바라야 하고,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와 각종 지도자는 거짓말쟁이나 위선자, 아부꾼이나 아첨꾼, 불성실한 자나 무책임한 자, 편견을 가진 자나 편파적인 자가 아닌 충성스러운 인재를 등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유는 사람을 잘 만나서 업적을 남기거나 출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잘못 만나서 감옥에 가거나 죽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부국강병을 이룬 중요한 이유는, 훌륭한 믿음의 신하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2. 다윗 왕의 소원과 세 용사의 목숨을 건 충성
다윗 왕이 지휘하는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세 용사가 추수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사모하여 말하기를,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고 했습니다. 그 우물물은 다윗 왕이 목동 시절에 마시던 물이었습니다. 다윗 왕의 말은 갈증 때문에 한 것이건 부하들을 시험한 것이건 충신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건 어처구니없는 말이요 분별없는 말입니다. 적진을 뚫고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시 적진을 뚫고 돌아오는 것은 목숨을 걸어도 될 일이 아닙니다.
군사 전문가는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윗 왕의 말을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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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간 후에,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 왕에게 바친 것입니다.
목숨을 건 세 용사의 행동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신하와 백성을 죽이고, 친족과 가족까지 죽인 통치자를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라고 하거나, 믿음직하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 용사는 몰랐겠습니까? 그들이 바보가 아닌데, 사지로 뛰어 들어가는 미련한 짓인 줄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키지도 않은 일에 무모하게 목숨을 걸었겠습니까? 한마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 용사는, 다윗 왕이 신들을 믿거나 신으로 자처하는 왕들과 전쟁할 때마다 승리했는데, 그 비결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 용사는 생사화복과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세 용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인 다윗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 용사는 권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왕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충성이라고 다 존경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독재자들과 침략자들에게 충성하는 것은, 대량 살상과 대량 겁간과 대량 파괴와 사유 재산 탈취라는 엄청난 죄악을 돕는 것입니다.
역대하 19:2은 선견자 곧 선지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이 말씀은 유다 왕 여호사밧이 사돈인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인 아합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과 전쟁을 벌였다가 아합 왕은 전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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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하여 돌아온 여호사밧 왕에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해지는 충성이라야 존경할 만한 충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성이란 여건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충성스레 복종해야 할 일꾼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사의 눈치만 보고도 복종하는 일꾼이고; 둘째는, 시켜야만 복종하는 일꾼이고; 셋째는, 강권해야만 마지못해 복종하는 일꾼이고; 넷째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면서 거역하는 일꾼입니다.
세 용사는 “내게 명령한 것이 아닌데…”, “개죽음하는 것인데…”, “불가능한 일인데…” 등등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다윗 왕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 결과 세 용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고,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아군의 사기를 한껏 드높였습니다. 그들은 충성심만 있은 것이 아니라, 실행할 능력도 있었습니다. 충성심과 복종심이 있어도, 능력이나 힘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해서, 계속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채우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직무 능력을 배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을 보면,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초개로 여긴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2:14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복음 선교와 막중한 사람과 막중한 일에 목숨을 걸고 충성하여 승리하거나 성공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나갔다가 적진을 뚫고 돌아오느라 피투성이가 된 세 용사가 가져온 우물물을, 다윗 왕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부어 드리면서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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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여기에 다윗 왕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또 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 왕은 여느 통치자들처럼, 스스로 신이나 신과 동등한 존재로 자처하는 교만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 신하나 국민의 충성과 섬김의 마지막 대상으로 자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 왕은 모든 충성의 마지막 대상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왕들과 독재자들이 하나님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섬김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강요한 탓에 얼마나 끔찍한 참극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이런 지도자들, 특히 통치자들이 본받았으면 좋았을 실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톤(George Washington)이, 제대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지내던 어느 여름날에 홍수가 나자 살펴보러 나갔습니다. 물이 얼마나 넘쳐흐르는지 지켜보고 있는데,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초로의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러는데, 저 좀 업어서 이 냇물을 건네 주시겠습니까?” “뭐, 그렇게 하지요.” 워싱턴의 등에 업혀서 그 냇물을 건너가던 육군 중령이 말을 걸었습니다. “노인께서도 군대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다녀왔지요.” “사병이셨습니까?” “장교였습니다.” “혹시 위관급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지요”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봅니다.” “조금 더 위였지요.” “그럼 중령이셨나 봅니다.”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대령이셨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당황한 중령이 “아니, 그럼 장군이셨습니까? 노인 어르신, 저를 내려 주십시오.”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저 업어 건네 드리지요.”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혹시 중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최고의 계급인 대장이셨단 말씀입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냇물을 다 건넌 후, 자신을 업어 준 노인을 바라보던 육군 중령은, 노인이 당시 미합중국의 유일한 오성 장군이던 조지 워싱턴임을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한국 같으면, 댓바람에 ‘당신, 내가 누군 줄 알아!’ 라고 했을 겁니다. 계급에 못 미치는 인격인 조직의 암이 많지 않습니까?
다윗은 왕으로서 세 용사의 목숨을 건 충정이 담긴 물을 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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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 했지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겸허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 고귀한 충정이 담긴 물, 아니 피를 받을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여겨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3. 맺음말
다윗 왕 같은 위대한 지도자란 믿음직함과 착실함, 책임 의식과 책임질 능력, 온유와 겸손, 깊은 이해심과 통찰력,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결단력이 있고, 모든 충성과 섬김을 권세를 정하신 하나님께 돌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지도자에게는 세 용사처럼 목숨을 걸고 충성할 사람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목사 역할을 해야 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의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ός)는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체가 믿음직하고 착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 모두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서 믿음직하고 착실한 생활을 하고,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욱 믿음직하고 착실하게 기도하며 말씀을 복종해야 합니다.
(설교의 성경 본문: 사무엘하 23:13-17, 고린도전서 4:1-2)
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14그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 6889-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