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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자살(마태복음 27:3-10)
최세창
- 2883
- 2018-07-17 20:40:42
마태의 독특한 기사인 이 부분은, 【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로 시작된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26:21, 45의 주석을 보라.)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는, 가룟 유다 자신이 예수님을 판 결과가 이토록 심각하게 전개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가 후회했거나(J. Wesley, A. Barnes, J. A. Bengel), 예상하긴 했으나 막상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후회했을 것(Bruce)①이라는 뜻이다. “유다는 아마 그리스도가 기적으로 막아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J. Wesley).
“뉘우쳐”는 메타멜레테이스(μεταμεληθεὶς)이며 ‘견해나 느낌의 변화를 나타내는 후회하다’, 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를 의미한다.② 가룟 유다는 자기의 배신행위의 결과를 보고 후회는 했지만, 자기 죄를 참으로 ‘회개하지’(3:2의 주석을 보라.)는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상기하며 회개할 기회를 자신의 감정의 변화와 양심의 가책에 얽매이는 것으로 오용하였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자학과 멸망의 길이었다.
“그 은 삼십(26:15의 주석을 보라.)을 ‘대제사장들’(2:4의 주석과 3:7의 “사두개인”의 주석을 보라.)과 ‘장로들’(15:2의 주석을 보라.)에게 도로 갖다 주며”는 예수님을 판 값인 은 삼십을 공회에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후회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가룟 유다의 말과 그에 대한 공회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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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in 이상근.
2) 참조: A. Bar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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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는 가룟 유다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목숨을 팔아넘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참조: 신 12:23, 렘 26:15, 겔 3:18, 20).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약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동고동락했고, 예수님의 공적 또는 사적 생활과 복음의 교훈과 기사와 이적 등을 잘 아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대해 죄가 없으시다고 증언했다는 점이다. 공식적인 공회에서의 증언은 아니지만, 공회원들에게 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이 무죄라는 결정적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원들은 그 사실을 묵살해 버렸다. 그들은 한마디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라고 하였다. 즉, 무죄한 예수님의 목숨을 팔아넘긴 죄는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으니 가룟 유다가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에게 죄의 값을 치르라고 한 것이다.
공회의 태도에 대한 가룟 유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고 하였다.
가룟 “유다”는 “은” 곧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 여기의 “성소”는 성전 구내(A. Barnes, “Bleek”③)라기보다는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④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아마도 가룟 유다의 심리 상태는 성소에 관한 법을 무시할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성소에 돈을 던져 넣은 그는 결국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는, 사람들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후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회개한 베드로(26:75)에 비해 보다 양심적이었다. 그는 자살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양심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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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이상근.
4) H. Alford, M. Henry, “Weiss, Carr, Bruce”(in 이상근),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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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 구원할 수 없다. 실생활에 있어서도 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은 보다 더 사소한 죄에 대해서 보다 더 큰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느끼게 마련이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주님 예수를 붙잡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에 대한 마태의 묘사와 달리, 베드로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 1:18)라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반즈(A. Barnes)는 “마태는 유다가 목매달아 죽으려 하는 모양을 묘사하였고, 베드로는 그 결과를 말한 것뿐이다.…그 밧줄이 약해서 끊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몸이 곤두박질해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의 죄의 값으로 끔찍한 고통의 죽음을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유다가 절벽이 있는 계곡에서 목을 매달았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나타난 설명이 한층 더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룟 유다가 성소에 던져 넣은 은 삼십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라고 하였다.
“피 값이라”는 예수님의 목숨을 산 돈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그들이 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죄인이라면,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고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성전고”는 코르바난(κορβανάν)이며 연보궤를 가리키는 것이다. 연보궤는 가조픨라키온(γαζοφυλάκιον)이며 ‘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금고’라는 뜻이다.
{이 연보 궤는 미쉬나⑤ 세칼림(Shekalim) VI. 5에 따르면, 열 세 개의 나팔 모양의 투입구가 있는 궤로서, ‘여인의 뜰’의 벽과 마주보고 있었다⑥. 헨드릭슨(W. Hendriksen)은 “히브리 알파벳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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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쉬나는 미드라쉬라고도 하는데, 할라카(Halachah) 곧 모세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구전이나 관습으로 지켜 내려온 것들을 집성한 것이며, 모세 율법 다음가는 권위를 갖는다.
6) in W. L. Lane. D. W. Burdick, A. E. Sanner, W. W. Wessel, 山口 昇, 반면에, W. Barclay, J. D. Stevens, J. Gnilka(하권, p. 236) 등은 13개의 연보궤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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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모든 연보궤에 표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용될 돈의 분명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성전을 위한 연보, 제물, 향, 나무, 또는 무엇이든지 그 목적에 따라 헌금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하였다.}(막 12:41의 주석).
“성전고” 곧 “연보궤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는 무죄한 자인 예수의 목숨을 판 피 값이므로 거룩한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이다. 신명기 23:18에는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라고 하였다.
사소한 일에 그토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들이, 율법인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말씀과 기사와 이적 등을 통해 메시아라는 충분한 증거를 나타내신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그토록 안달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된 그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라고 하였다.
그 교권자들은 은 삼십의 돈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한 후에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이방인 개종자들과 유대인 나그네들의 묘지를 삼았다. 묘지를 삼을 정도의 밭이 은 삼십밖에 안 된 것을 보아 거의 버려진 땅이 아닌가 싶다.
그 밭에 대해, 마태는【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ἕως τής σήμερον)는 ‘마태가 본서를 기록한 때까지’라는 뜻이다.
“피밭”(ᾀγρὸς αἵματος)은 피 곧 목숨의 값으로 산 밭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아겔다마라고 한다(행 1:19). “그 밭은 예루살렘 성밖 시온산 남쪽에 있었다”(A. Barnes).
그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일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에 대해, 마태는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이 실상 예레미야에는 없고, 유사한 내용이 스가랴 11:12-13에 있는 것을 보아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인용으로 보아야 한다. 마태가 스가랴를 예레미야로 잘못 기억했거나, 필사자가 스가랴를 예레미야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스가랴 11:12-13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유대 민족의 목자로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를 멸시하며 배척하였다. 그래서, 스가랴는 그들에게 자신의 삯(가격)을 매기라고 요구했고, 그들은 그를 멸시하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 노예 한 사람의 값인 은 삼십을 쳐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셨다. 이 내용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된 것이다.
“정가한 자의 가격”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여 매긴 가격’을 의미한다.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69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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