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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자리에 넘어감을 경고함
도현종
- 2620
- 2018-07-16 18:29:55
교회분쟁과 재판’에 대해서 ‘목사가 관여하는 것은 ‘목회학’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투로 말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목회(牧會, Ministry)라는 것은, ‘여러 회중(양떼)을 잔잔한 물가로, 푸른 초원으로, 욕심 부리는 자에게는 자제를 시키고(羊들은 양순하고 온유해서 없지만, 인간이라는 양떼 중에는 고약한 자가 있음), 밤중에는 간악한 이리 떼가 와서 양들을 해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등이다.
그래서 목자는 사명감에서 봉사, 설교, 교육, 그리고 돌봄(oversight)을 목회라고 하겠다.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의 진리를 오늘 이 한국 땅에 전하고 민족사와 함께 자라감에 있어서 ‘목민심서’의 앞의 두 글자 ‘목민’이란 것과 우리 목회와 결부시켜 우리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은 ‘목민의 목회’(牧民의 牧會)를 말하게 되었다.
<목민심서>와 같은 우리나라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학자의 사상에서 기독교적인 것, 또는 복음 정신에 통하는 무엇을 찾아내어 오늘 우리들의 역사적 현실에서 구현해보는 노력 같은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민의 목회’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목민심서> 속에는 너무나도 현실 목회와 관련된 유사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기강(紀綱)에 대한 것(倫理道德), 인간을 사랑하는 것(愛民), 교민 하는 것(說敎, 敎育), 예배 드리는 것(禮拜), 세제 하는 것(獻金, 十一條), 시설하는 것(예배당, 교육관 建築), 송사(裁判, 勸懲), 관리의 부임과 해임(轉任)에 관한 것(목사의 교회 視務, 委任, 移牧, 停年退任)에 관한 질서, 바람직한 도리 등 이다.
더 강조하자면, 민중(牧民)을 대변하고 민중의 이익과 복지, 민중의 인격 옹호와 인격의 존엄성 및 수호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서 배운 것이라 함을 아무도 부정치 못하리라. 관리(牧民官) 또는 현재 목회자들이 어떻게 백성(양떼)의 사정을 살펴서 목민을 해야 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아주 귀중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민 정신이 곧 목회 정신이다
이것은 윤리 6조 즉 목민관(목회자)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고, 정신 자세와 몸가짐, 행동까지 바르게 함에 대한 교훈이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촛불을 켜놓고 세수한 뒤에 옷을 정돈하여 입고 띠를 띠고 묵묵히 단정히 앉아서 정신과 기운을 함양한다. 조금 뒤에 드디어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서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찾는다. … 힘써서 사욕을 끊어버리고 한결같이 천리(天理)만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이 구절은 우리 목회자들이 새벽기도회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날의 할 일을 스스로 정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목민관이 되면 그 몸에 모든 화살이 집중하는 과녁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니, 한번 말하고 한번 행동하는 것을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목회자가 일반신도나 사회인 앞에서 어떻게 자기 행동을 삼가고 살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당시 관리들이 술과 연락을 탐함으로 얼마나 관리 의도에서 탈선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노래와 풍악소리는 백성의 원성을 격발케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즐거우니 좌우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다 즐겁다 해도, 온 성내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운 것은 아니다. 한 성내 사람의 마음이 다 즐겁다 해도, 온 관내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다. 그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춥고 배고프며 빈곤하고 궁핍한 자가 있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울부짖으며, 하늘을 봐도 빛이 없고 참담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는 사람이 있어서, 한번 풍악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부릅뜨고 길에서 욕하고 하늘을 저주할 것이다. 굶주린 자가 이 노래와 풍악 소리를 들으면 더욱 더 그 주린 것을 한탄할 것이다.”
이런 말들은 정다산 선생이 인간의 괴로운 현실과 멸시받고 원망스러운 현실에서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牧會者)이 아쉽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그대로 약자에게 동정하고, 눌린 자 편에 서고, 억울한 사람을 보살펴주고 유린당한 인격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음을 이 <목민심서>에서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목회는 목민 정신이다. 우리가 만나고 대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한 사람의 인격자로 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소중히 여기고, 심령이 비틀어진 자들은 징치(懲治)하여 바른길을 가도록 선도하는 것이 목회자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 하는 도다. 너희가 연약한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짐승들의 밥이 되었도다.”(겔 34:2~5)
에스겔은 그 백성을 양처럼 돌보지 못하는 목자를 규탄하고 있다. 오늘의 목회자는 몸 바쳐 ‘목민의 목회’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힘없는 백성 편에 서야 할 것이며, 약한 자 편에 선 목회라야 할 것이다. 눌린 자 편에 선 목회, 갇힌 자 편에 선 목회, 탈취 당한 자 편에 선 목회, 고독한 자 편에 선 목회 즉 ‘목민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목민의 정신으로 사시다가 백성들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 소망 없는 백성을 위하여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가 평생 따라가야 할 길은 ‘목민의 목회’라야 한다. 황홀하고 좋아서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내려가셔서 병들고, 믿음이 없어 무능한 배성들을 위해 그들의 아픔을 덜어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있는 억조창생 중에, 특히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 헐벗은 자들, 옥중에 있는 자들(마 25:35~46),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주님의 교훈을 명심했으면 한다. 그런고로 ‘목민의 목회’는 특히 영혼의 기갈 속에 있는 자들, 나그네와 같은 인생살이에 고독한 자들, 병들어 고통당하는 자들과 억울하게 무고당하여 징계와 송사(訟事)를 당한 자를 위해서 그들의 아픔을 덜어 주는 일이 목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감독회장 그 자리가 복음의 자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