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내 몸뚱이마져 네가 가져가라
도현종
- 2356
- 2018-07-15 19:14:37
사마천 그는 오늘 감리교회에 어떤 호통을칠까?
사기 열전 70편을 전개하면서 백이와 숙제 형제 편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왜 사마천은 어쩌면 평범한 왕자들의 이야기를, 그것도 시대에 영웅적인 기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들을 제시하면서 거대한 역사서를 구성하게 되었을까. 무왕은 주왕의 폭정을 빌미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백이와 숙제는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고자 곡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하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수양산 고사리조차 온전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연명하고 부끄럽게 죽었는가? 사마천의 백이와 숙제 비판 논리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사기 열전 첫 번째에 배치하였다. (사기)를 지은 목적과 사관으로서 책임감을 드러내고 있다. 사마천은 ‘재산을 탐내는 자는 재물 때문에 죽고, 삶보다 의 중시하는 자는 이름에 목숨을 바치고, 이름과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권세를 추구하다 몸을 망치며, 평범하게 사는 보통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연명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이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권세에 눈이 멀어 백성의 시선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권력자만 바라보면서 부귀를 탐하고 가렴주구를 일삼다 결국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성격은 없었을까? 한무제에게 호통을 치고 주리고 힘든 백성의 역사를안고 웃으며 궁형이란 형틀로 향한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끔찍한 궁형을 당한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울분을 풀면서 불후의 저작인 (사기)를 완성했다.
그가 당한 궁형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형벌로 꼽힌다. 그리고 그 형벌은 또 가장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로 역사에 길이 남는다. 기원전 99년 이른바 이른바 ‘이릉(李陵)의 화(禍)’를 당하고 만다.
‘이릉의 화’는 이릉이 불과 5000명을 이끌고 흉노족을 토벌하러 갔다가 투항한 사건이다. 한나라 조정은 항복한 이릉을 대역죄인으로 성토한다. 이 때 사마천은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라면서 변호한다. 그 때문에 사마천은 구렁텅이에 빠진다.한무제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결국 ‘궁형’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는다. 차라리 사형이 나았다. 궁형은 선비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사마천은 울부짖는다. 마침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요참형(腰斬刑·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받은 임안에게 쓴 편지 등에…. 얼마나 생식기를 잘린 궁형을 수치스러워 했던지 ‘욕(辱)’이라는 낱말이 무려 19번이나 나온다.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욕(辱)자를 19번이나 쓰면서 치욕스러워했다.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저 또한 거세되어~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합니다. ~아아! 몸이 망가져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사기)
사실 사마천에게는 몸을 보전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돈을 주면 죄를 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벌금형이었다. 하지만 대 역사가 그에게 전혀 그만한 돈이 없었다.
“나는 가난하여 속죄할만큼의 단 하나의 재물도 없다.~거세되어..
충열의 호통을 날린다.
"당신이 54년 동안 황제로서 한 일이라곤 황제라 뻐기면서 제사를 여러 번 치른 것 뿐이다."라는 통렬한 조롱이다. 그 뒤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무제에게 "이제 내 몸뚱이까지 네가 거두어가라"
하늘의 도는 공평하여 늘 착한 사람의 편에 있다고 한다. 백이와 숙제는 어짊을 쌓고 행동을 깨끗하게 하였으니 착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늘은 어찌하여 두 사람을 굶어 죽게 한 것인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반해 도적 도척(盜蹠)은 어떤가? 그는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은 포악한 인물이었다. 이 악랄한 도척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말로 할 수 없는 못된 짓을 다하였으나, 천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장수하였으니 이는 그에게 과연 덕행(德行)이 있어서인가?
이런 것이 하늘의 도, 즉 천도라고 한다면 그 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대답을 사마천은 던져준다.
(백이열전)의 내용이다. 사마천은 천도에 대해 회의적인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사마천 자신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피로서 얻은 것이다. 사마천은 한왕조가 천명을 얻어 왕조를 세웠다는 것을 믿고 하나의 위대한 왕도정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 자신이 50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행운을 한몸에 안았다고 굳게 믿으면서 제2의 공자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빈객을 사절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면서 천자의 총애를 받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은 보답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궁형이라는 참형을 당하게 되며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피의 교훈은 사마천의 천명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사마천은 이들의 참사에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서 선악과 인과응보가 전도된 무수한 사례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늘에 따지려는’(問天)강렬한 충동이 생겼고, 이성의 광명이 천명사상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첫 권을 ‘정신의 귀족’을 대변하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리고 『자서』를 제외한 『사기』130권의 마지막 권인 129권을 ‘현실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장사꾼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으로 마무리하는 절묘한 안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둘을 대비하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오한 철리를 터득함과 동시에 유익한 감각을 얻게 된다. 성인과 장사꾼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것이다. 성인과 장사꾼의 차이점이 역사의 구분이란것이다. 결국 백이와 숙제는 정치적 장사꾼이란것이다. 이것이 대답이다.
태어날 때 하늘이 세 번이나 물었다고 해서 이름도 삼문(三問)으로 지은 매죽헌 성삼문은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분의 시조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 한탄하노라 / 주려 죽을진정 고사리는 어디에 난 것인가 /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고사리도 주나라 땅에 난 것이니 그것을 따먹다 굶어 죽었다고 백이숙제가 훌륭하진 않다는 단죄이다
역시 사마천의 제자다운 기개이다.
백이와 숙제가 주무왕의 말고삐를 돌리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에 칼을 물고 자진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니, 선비란 참으로 칼날 위에 사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사마천의 길이다.
백이 숙제에겐 명분에 빠져 개혁을 도외시했다는 폐단이 존재한다. 백이 숙제가 굶주려 죽어간 자취에서 신의를 읽는다. 절개는 가상하되 기릴 것까지는 없다는것이다.
수양의 왕위찬탈 앞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성삼문의 절개는 백이 숙제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높은 품격 자체라 할 것이다.
백이 숙제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성삼문의 절개는 만고에 푸르다.
성삼문의 외침이 들려온다.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에 실천하는것이다."
간신 하진을 나무라는 시이다.
漢室傾 危天數終
無謀河進 作三公
幾番不 聽忠臣諫
難免宮中受劍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