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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에서 나타난 계시(마 27:45-50)
최세창
- 1232
- 2018-07-31 19:45:04
마태의 기사는 【45】“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우리의 시간으로 정오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의 “온 땅에”(ἐπὶ πάσαν τὴν γήν)는 ‘그 온 땅 위에’, 즉 ‘유대 온 땅 위에’를 의미한다.
“어두움”에 대해 {시로코(sirocco: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로 부는 열풍) 안개로 생각하는 학자들(Lagrange, Schmid)①과 자연의 두려움, 또는 자연의 동정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W. Barclay, J. N. Davies)이 있다. 웨셀(W. W. Wessel)은 “아마도 어두움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 때문에 생겼든지, 또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4월에 예루살렘에서 보통 나타나는 검은 열풍(Black sirocco)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막 15:33의 주석). 그러나 어떤 추측도 그럴 듯한 근거는 없다.
우리는 다만 마태가 이 어두움을 하나님의 특별한 이적인 초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현상은 아모스 8:9의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의 성취이다.
이 어두움은 심판에 대한 예언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버림받는 세계의 암흑을 나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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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in J. Gnilka, 하권, p. 424, 주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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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 점은 【46】“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로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② 중 마태의 유일한 기록인 “엘리(’Ηλί: 히브리어 음)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 22:1의 아람어이다.
“엘리”(’Ηλί)가 마가복음 15:34에는 아람어 엘로이(ἐλωῒ)로 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호칭으로는 드문 경우이다. 아마도 사적인 부자 관계로 대하는 대신에 구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공적 관계로 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동사는 사박다니(σαβαχθανεί)이며, 그 역사적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이 철회되어 적들 손에 넘겨져서 훼방과 조롱 속에서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는 시편 기자가, 밤낮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묵묵부답인 데 대해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서 나온 절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절망 속에서도 깊은 신뢰감으로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올 것을 찬미하였다(시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는, 세상 죄를 지심으로써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고통을 토로하신 것이다(사 53장, 고후 5:21, 갈 3:13, 벧전 2:24).③
{테일러(Taylor, p. 549)는 “예수의 이 말씀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타당한 해석은 이 말씀이 극도의 고독감에서 튀어나온 부르짖음이라는 해석이다. 즉, 극도의 고독감 속에서 그가 죄의 끔찍함을 느꼈고, 성부와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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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상의 칠 언의 순서: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마 27:46).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6) 다 이루었다(요 19:30). (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3) E. Schweizer, W. Barclay, “Cranfield”(in A. E. Sanner), A. E. Sanner, W. W. Wessel, “Taylor, p. 549”(in W. W. Wessel), 山口 昇, 마경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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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한 교제가 잠시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 부르짖음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④ 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어떤 이들은 우리를 위하여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지옥의 정수, 즉 하나님과의 분리를 맛보는 예수님의 완전한 고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무서운 위력을 보게 된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통은, 우리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익이 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께서는 죄인이 되신 고통과 죄의 장벽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이중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분담하실 수 없거나, 충분히 이해하실 수 없는 인간 경험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였다.}(막 15:34의 주석).
여기서 우리는 성부께 버림받은 성자가, 실은 성부의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바로 구원의 뜻을 세우신 성부께 대한 절대적 순종이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을 전체로 보면, 절망 속에서도 깊은 신뢰감으로 장차 여호와의 구원이 올 것을 찬미하는 시이므로, 예수께서 세상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면서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하며 기도하시는 심정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보기는커녕, 예수님의 처절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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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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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짖음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마태는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라고 하였다.
{오해할 소지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십자가의 고통 중이었기 때문에 발음이 명확할 수 없었다. 둘째, 엘리야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준다는 전설이 구약 후기에 발달되었다.⑤ 셋째,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들려 온 소리인지라 있음직한 일이다(E. Bickersteth, 마경일). 넷째, 엘리야는 메시아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는 신앙이 있었다(W. W. Wessel).}(막 15:35의 주석).
위와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사람들이 ‘엘리(엘로이)…’를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미루어 조롱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엘리야를 부르는 주제에 메시아 행세를 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한 일에 대해, 마태는 【48】“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이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여기 언급된 음료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마셨던 신포도주인 포스카(posca)라면,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병사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막 15:36의 주석).
“해융”은 스퐁곤(σπόγγον)으로서 ‘해면’, ‘스펀지’를 의미한다.
그 사람은 해융에 “신 포도주”를 적신 후에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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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W. W. Wessel, “Cranfield”(in 이상근), 마경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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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요한복음 19:29에는 우슬초⑥로 되어 있는데 갈대와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그 남은 자들에 대해, 마태는 【49】“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라고 하였다.
그 남은 사람들의 말은 동정이나 기대감이 아니라 조롱으로 한 것이다(시 69:12).
예수님의 임종에 대해, 마태는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하였다.
“크게 소리지르시고”는 {예수님의 가상 칠언((架上 七言)을 미루어 기진 상태인 예수님께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E. Bickersteth)이 제공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는 달랐으며, 그의 큰 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헐떡거림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기하는 승리의 외침이었다”(W. L. Lane, W. W. Wessel). 일반적으로 그 큰 소리는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승리의 외침으로 이해되고 있다.⑦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여기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를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큰 소리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셨다는 의미에서의 승리(골 2:15)와 아버지께 대한 전적 의탁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혼이 떠나시다”는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운명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Tertullian, Augustine 등).⑧}(막 15:37의 주석).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운명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와 저주와 죽음과 마귀에 대해 승리하셨고,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승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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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슬초는 휘스소포(ὑσσώπῳ)로서 ‘히솝풀’ 또는 ‘우슬초’를 말하는 것이며, 옛날에는 약용으로 쓴 박하의 일종이다. 유대에서는 의식(儀式)과 치병(治病)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우슬초가 마태복음 27:48과 마가복음 15:36에는 “갈대”로 되어 있는데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7) F. C. Grant, A. E. Sanner, W. Hendriksen, 마경일.
8)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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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7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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