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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도현종
- 1098
- 2018-07-30 18:04:31
공민왕이 탐관오리들을 벌할 때 옆에서 오리들이 '저놈들 때문에 우리까지 욕먹는다.' '더 세게 때려라.'라고 전해진다. 오리가 변하면 탐관오리가된다. 간신이된다.
석 자 정도의 작은 몸으로 좌·우·영 정승을 지냈으며 임진왜란과 정권 교체의 혼란기에도 빼어난 인품과 능력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정승으로 활약했다.
오리 선생은 석 자 약 1m 정도의 작은 체구를 지녔다. 효종이 1651년에 인조의 종묘에 이원익을 제사를 지낸다고 내린 교서인,<인조묘정배향교서>에 "신고불승의(身苦不勝衣)"라 표현한다. 의복마저도 버거운 몸으로, 어릴 적에 병치레가 잦았다. 이준경이 건강이 염려되어 명종에게 부탁하여 약을 먹였을 정도였다. 그 정성 덕인지 77세 고령에도 이괄의 난에 인조를 모시고 피난을 갈 정도로 체력과 강인한 정신을 지녔다. 그리고 팔십이란 말도 무색하게 88세까지 장수했다.
수줍은 성격으로 말수가 적었지만, 관직에서 직언은 서슴없이 하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피난할 때에 숙박한 곳에서 준 음식을 직접 먹고 독약이 있는 지 알아본 후에야 임금에게 바쳤을 정도로 성실하게 소임을 다한 충신이었다. 왕가의 후예임에도 소박하고, 청렴한 관직생활로 청백리로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이 함락되었을 때에 평안도순찰사로 있으며 평양 탈환의 공을 세우고, 사도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했다. 선조가 선무공신까지 인정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임금을 보필한 공만 받겠노라 했다. 그런데 이 호성공신도 스스로 일등이 아닌, 이등으로 받을 정도로 치적을 자랑하지 않는 성품을지녔다. 유성룡이 받은 교서에 오리 선생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호성공신으로 녹훈,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가 은퇴한 충신 오리 이원익이 비가 새는 2칸 초가에 거주하는 것에 감탄하여,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1630년에 하사한 집이 관감이란집이다. 청백리로 살아온 자세가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모든 백성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이란 의미에서 ‘관감(觀感)’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후 훼철되어 1916년에 관감당을 다시 지었다.
제 갈길 못가는 감리교회 배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