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급가속(急加速)페달을 밟고 있는 직무대행...

오재영
  • 1534
  • 2018-08-12 00:05:58
초년목회를 강화도에 있는 교동 섬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당시 면 소재지에서 오토바이 대리점을 운영하는 권사님의 아들 형제가 있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전문가의 시선으로 초보수준인 나의 운전 실력이 염려되었든지 어느 날 대화중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운전석에 오를 때면 떠오르곤 한다.

“전도사님! 오토바이 상회에서 한 대가 팔릴 때 마다 자기들 끼리 하는 말이 있답니다. 또 과부 한사람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과속(過速)이란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운행 중에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초과했음을 의미하며, 운전의 기술이란 예측 하지 못한 돌발적인 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차이입니다....그의 표현대로 125cc의 오토바이로 여러 위기를 겪었으나 오로지 은혜로 11년의 섬기든 사역지를 떠나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가끔 주변에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질주하는 철부지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그때, 이제는 권사님이나 장로님이 됐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집사님의 말씀이 떠오르곤 한다. 모닥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죽은자 말이 없어 그렇지 객기에 가까운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본인은 물론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는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교단을 허물기로 작정한 사람들...

오늘 나는 또 한분의 무리한 과속 페달을 밟고 있는 분을 본다.
그동안 설왕설래 떠도는 말들이 빈칸에 퍼즐을 맞추어 가듯이 이제는 서서히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분이 왜 이 시점에서 그 머나먼 거리를 무엇 때문에 매주 왕래하면서 온갖 불신과 다툼을 조장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집착하는지를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시행되는 것마다 깊은 고뇌 속에서 주님의 면대라기보다는 임기웅변, 조령모개(朝令暮改)의 서글픈 모습들이다. 총실위에서 인준을 받았기 때문인가? 그것이 명분이라면 다시 소집하여 재신임을 받아보시라! 많은 이들이 지금 본인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를...

옛말에, “강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오랜 경험의 검증된 결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혹자는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했는데, 130여년이 된 우리교단 에는 어찌 이리 등장하는 지도자라는 이들마다 헤세와 오기에 매달려 궤변과 요설, 뻔뻔스러움과 함량미달의 천박함으로 수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부끄럽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진정 본인이 아니면 교단이 허물어진다는 절박감 때문에 그 머나먼 천리 길 마다않고 왕복을 하시는가? 정말 가련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미안한 표현이나, 직대께서는지금 이리 헤매고 있을 때가 아니라 온 성도들과 함께 주님께 엎드려 은혜(恩惠)구하여 빚 갚을 일에 온 뜻을 모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방향을 제시하는 증인들...

5백여 년 전,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중세교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를 비롯한 일곱 명의 수사들이 모여 발족한 예수회의 결의문의 내용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하여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가는 이들의 마음을 언제나 숙연케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세계 어느 곳으로나 시체처럼 운반이 되고, 맹인의 지팡이가 되겠습니다....”이렇게 헌신으로 이루어진 모임이 온갖 부패와 혼란 속에 있는 가톨릭교회를 안정시키고 교회의 본질인 복음전파에 매진함으로써 선교에 큰 역할을 하게 되므로 세계 곳곳으로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까지 이르러 마포 한강변에 서강 대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본(本)이랄 수 있는 사도바울께서 사역과 생의 마지막이 될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를 향하면서 그가 지난 3년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부탁 한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주께서 자기피로 사신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17~38).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같을 뿐이라”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으로 하루를 다가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주는 차치하고서라도 세계지도의 비중으로 보더라도 하루살이에 불과한 인생들인 우리가 은혜가 아니면 감히 어디에 서겠다고 함부로 ‘부화뇌동’ ‘표리부동’함으로 신앙을 떠난 위치에서 요행을 바라는 삶에 기대를 걸고 있겠는가? 진정 자기십자가를 바로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본인들의 위치를 스스로 알아 경외함으로 자중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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