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분의 머리 깎인 삼손처럼 퇴장하는 이를 보면서...

오재영
  • 1302
  • 2018-08-17 18:20:07
왜 우리는 남의 불행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까?

어제는 또다시 안팎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총회특별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예상대로 당사자들의 반응은 모든 절차와 과정이 불법이기에 인정할 수가 없다는 성명서로 대응했다. 앞으로는 그가 누구이든지 성직(聖職)을 섬김이 아닌 세속욕망의 선상에서 함부로 나섰다가 패가망신한 앞선 이의 실패를 보면서도 자기성찰의 자세없이 본인은 그와 다를 것 이라는 오만함으로 등장하는 이들마다 동일한 아픔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혼자서 생각을 해본다. 왜? 무엇 때문에 저들은 저 자리에 집착을 할까? 교단을 위해희생하지 못해서? 지금 본인들 때문에 교단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 있는데도. 정말 모를까? 한마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명색이 성직자라는 사람이 어찌 이리 하는 일마다 기본상식을 갖춘 세상 사람만도 못한 행동들을 할까? 오늘은 또 젊은 등치의 아르바이트생들까지 동원했다니, 그 젊은이들은 목사를 어찌 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교단을 위하여 무슨 남다른 희생을 하려고 저처럼 처절한 몸부림을 칠까?

이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성경이 말씀하고 교회의 역사가 증언하듯, 지나온 과정 중에 스스로 남의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이들 중에 후세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가 있었는가? 그들 모두는 후세인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원인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망이 아닌 이타적 삶을 위해 자리나 직책에 연연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것이 주님의 법칙이요 우리는 그 법칙을 믿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앞장서서 목숨 걸어야할 그 자리에 무슨 미련 때문에 그리 집착을 하는가?

목회자의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는 목회자의 지도력의 핵심은 희생하는 리더십이다.
여러해 전 국내서점가를 휩쓸고, 후에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남극대륙의 횡단을 꿈꾸었던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ton, 1874-1922)’이라는 영국 탐험가의 세 번째 원정실화를 담고 있는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의 내용은 한사람의 올바른 지도자의 희생과 헌신적인 리더십과 인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그가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남극 탐험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조난을 당하였고, 구조를 요청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부빙(浮氷)에 갇혀 난파된 배를 버리고 497일 만에 도착한 섬도 안전한 지대가 아니었기에 대원들 중 일부가 작은 보트를 타고 1,400Km가 넘는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를 요청하러 가야만 했다.

섀클턴은 자신이 그 위험한 길에 구조대를 인솔할 것을 자청하면서, 대원들 중에서도 다루기가 힘들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과 섬에 남겨진 사람들과도 갈등을 일으킬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떠난다. 그것은 섬에 남아있는 대원들까지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반면에 그에 따르는 모든 위험은 자신이 감당하고자 하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 달여의 여정 중에 함께 떠난 대원들로 인하여 여러 위험한 고비를 겪기도 하였으나, 드디어 그가 이끈 구조대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도착하여 구조의 요청과 함께 마침내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든 대원이 구조되었다. 그들이 견뎌야했던 497일간의 시간도, 구조요청을 위해 떠났던 한 달여의 시간도 ‘어니스트, 섀클턴’의 탁월한 리더십과 희생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생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흔들 수 있는 깃발, 믿을 수 있는 신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가?

오늘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이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오는 때에 오직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라 거룩함과 순결함만으로 교활한 사단과의 영적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이 취해야 할 각오와 태도는 분명하다. 우리가 영혼을 교도하는 목회자라는 것이 사실이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 종처럼 낮아지신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회사역에서 7년을 하루같이 괴로움과 고통은 자신이 감당하고 편안하고 좋은 것은 함께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돌리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영적 리더가 소유해야할 정체성이다.

여러해 전, 어느 세미나에서 지명당해 앞에나와 간증을마친 목사에게, 강사 목사께서 지나가는 말로 “ * * 목사! 목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목회는 피를 먹여야 하는 거야!” 특이한 단어이기에 얼마 후에 개인적으로 만나 그 말의 뜻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의 설명을 듣고 한동안 마음에 부담으로 간직한 적이 있다. 그분의 그 말뜻은 목사는 자기가 섬기며 인도하는 교회의 중직들이 담임 목사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우리목사님은 우리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를 한 분”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목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래전 첫 목회지에서 밤새워 읽었던 고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내용 중에, 지금도 가끔 펼쳐보는 부분이 있다. 의원의 자격에 관함인데, 의원에게는 치병용약(治病用藥)의 술(術)이나 의료제민(醫療濟民)의 이상에 앞서 그가 의원이고자 하는 그 심지와 품성을 중히 여겨야한다 는 내용으로, 모자라는 재주는 채우면 된다. 그건 세월 속에 심성만 곁들이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노력과 단련의 경지다. 그러나 의의 길에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병자를 연민을 담아 보는 눈이 있어야... 동시에 업(業)을 출세나 치부의 욕망과 바꿀 수 없다는 무심지의(無心之醫)의 바탕. 의원이라 하는 이가 정작 병자의 아픈 데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건 흔하디흔한 의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달의 길이 아닌 의(醫). 치부의 길이 아닌 의. 병들어 아파하고 앓는 이들의 땀 젖은 돈으로 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의(醫).....”

이제는 죄(罪)를 물마시듯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느낄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아직까지도 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물과 죄(罪)로 죽어있는데, 오늘도 소수의 무리에 불과한 이들이, 세상을 향하여 보이라는 본(本)은 보이지 않고 어찌하여 모두를 적(敵)으로 삼아 영혼구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신만 허물어지는 뻔하고 사악(邪惡)한 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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