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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군선교의 시작
김정효
- 1293
- 2018-08-19 18:58:49
올해에도 11개 국가에서 15명이 참가하여 그동안 13년에 걸쳐 총 225명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참여하는 일주일간의 프로그램 중에는 전쟁기념관에서 6.25로 폐허가 된 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전방에서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병사가 동시에 세례를 받는 진중세례식과 오산리기도원에서 일만 오천에 가까운 현역 장병들이 소리 높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6.25 상기 기독장병 구국성회를 참관하고는 일생일대에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받고 하나같이 묻는 질문은 “어떻게 한국 군은 이런 신앙적인 토대를 가질 수 있었나?”이다.
한국군 군선교가 태동할 때 이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시대부터 이 나라에 와 있었고, 뒤에 대전 목원대학을 설립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 쇼우(W. E. Shaw) 목사는 그해 9월 18일 장로교 대표 한경직 목사와 다른 교단 대표들을 대동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군종제도의 설립을 건의하였으며, 그 후 대통령 비서실 지시로 국방부는 국방신 제 29호(1950.12.21)로 군에 군종제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오늘날 260명의 군목과 650여 명의 일반교회 목회자가 군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법적 뒷받침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에서 군종제도가 있는 나라는 60여개가 되지만, 군내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라는 그보다 훨씬 적다.
휴전 후 이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민간인과 군인이 편리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곳에 교회를 건축하라.”는 지시에 따라 용산에 육군본부교회(현 국군중앙교회 전신)가 건축되어 1955년 5월 29일 이 박사 참석 하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원래 이 박사는 정동감리교회 장로였지만 주일이면 으레 육군본부교회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군선교에 힘을 실었다.
이렇게 한국 군선교의 초석을 놓으신 분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이지만 이 기초 위에 기둥을 세워 군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분은 20세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50년 9월 이 대통령에게 군종제도의 설립을 건의할 때부터 2000년 4월 남한산성 기슭 6평의 좁은 처소에서 98세의 나이로 무소유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한 평생 군복음화 후원회 회장으로써 병사들이 모이는 곳이면 전후방 어느 곳이나 그의 발자국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울라. 조국을 위해 기도하라. 조국을 위해 힘써 일하라. 그리고 이 땅 위에 우리의 거룩한 피를 뿌립시다.”라고 애국, 애족을 외쳤다.
한국군 군교회 편람에 보면, 전후방에 1004개의 군인교회가 있다. 그 중에 국가예산으로 지은 교회는 146개(15%)에 불과하며, 그 밖에 85%는 개인이나 민간교회 후원으로 세워졌다. 이 민간교회 후원으로 이루어진 교회 중 175개 교회는 한경직 목사님이 담임하는 영락교회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정부가 지은 교회보다 더 많은 수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영락교회였을까?
영락교회는 대부분 북한에서 38선을 넘어온 실향민이 세운 교회다. 그들은 고향에 고대광실, 문전옥답을 두고 빈손으로 38선을 넘은 교인들이기에 하늘나라에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미리 이 세상에서 체험한 분들이다. 그러기에 전방에 군인교회를 세움으로써 기쁘게 재물을 하늘나라에 쌓을 수 있었다고 본다.
그 위에 감히 한경직 목사님의 신앙적인 일면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템풀턴상을 수상하러 뉴욕 템풀턴 센터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를 소개하는 사회자가 목사님은 한국에서 제일 큰 장로교인 영락교회의 설립자이며, 피난민과 가난한 자, 그리고 고아의 아버지이며,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회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그를 소개하였다.
이어 사회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90세의 노구를 이끌고 등단한 목사님은 “나는 죄인입니다. 일본 식민지 때에는 그들의 강요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당이 북한을 점령하자 섬기던 신의주 제 2교회를 뒤로하며 홀로 월남하였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서울에 영락교회를 버리고 부산으로 나 혼자 피난 갔습니다.”라고 참회의 고백을 했을 때, 전 세계의 시상식 시청자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이 거룩한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