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이재명 의사

도현종
  • 1701
  • 2018-08-20 20:33:18
아관파천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진 러시아 대사관으로 고종과 함께 피신한다.

그것도 모자라 3월 29일, 아관파천 50일 만에 서울-인천간 철도 부설권이
이완용 손에서 미국인 모스에게 주어진다. 특혜로 채워진 전문 13조의 경인철도허가서를 손에 쥔 모스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근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철도를 덥석 외세에 넘겨준 이완용. 하지만 이것은 나라를 팔아먹기 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일본으로 기울자 결국 그는 친일파로 변신했고, 급기야 일제에 나라를 파는 데 최선봉에 서게 되었다.

친러파 친미파에이어 친일파가 되어버린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생각한다.

이완용은 그해 12월 22일 오전 10시 종현성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다 이재명 의사가 휘두른 칼에 어깨와 허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를 태우고 가던 인력거꾼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경호원이라고도 알려진 인물이다. 칼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했으나 명을 끊지는 못했다.

수술을 담당한
스즈키 고노스케가 창상의 위치와 깊이, 흉기의 종류, 창상의 경과, 예후 등을 기록했다. 의사의 말이 가관이다.
"이 수술법이 개발되지 않았으면 충신은 즉사했다."

이완용 처단에 실패한 이재명은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불과 스무 해 남짓한 짧은 생애를 산 ‘열혈당’ 이재명 의사. 평북 선천 출신으로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기독청년 이재명의 삶은 묻혀졌다.

교과서에 단 두 줄로 기억된 부끄러운 이나라 역사 현실이다. 다른 위인들도 마찬가지 현실이지만....

스무 살, 입신양명을 꿈꿨어야 할 이 청년은 왜 죽음으로 구원에 다다르려 했을까.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도래하기를 바랐던 한 청년의 죽음.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재명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봉인해 버렸다. 예배당 안에서 동방요배를 하고 교회를 나서면 신사참배를 했던 한국교회가 이재명의 삶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부끄러워해야한다.

기독청년 의사(義士),를 지워버린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이재명은 동상으로 남아 또 풍찬노숙을 하고 있다. 마이산이 보이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재실 앞에 쓸쓸히 서 있다. 이재명은 진안이 본관이다.

1962년 이재명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다. 그 훈장을 받을 후손이 없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자 2000년 진안이씨 대종중이 나서 이 의사의 유지를 잇겠다고 훈장증을 받았다. 성역화에 국고 등이 지원됐다. 분단은 이처럼 수많은 열사들을 ‘반쪽 독립운동가’로 만들고 말았다.

“가련한 매국적신, 내가 꽂는 십자가를 받아라!”

“나는 부활해 일본 너희를 망하게 할 것이다”

이재명은 태어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평양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양부와 재가했다. 그리고 1894년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자 함경도 북청으로 피난했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양부는 이때 그를 수길에서 재명으로 개명하고 평양 미션스쿨 일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신앙을 갖게 되었고 훗날 집사 직분을 받는 계기였다.

이후 선교사 등이 주도해 하와이 이민노동자를 모집하자 공부를 더할 겸 이에 응했다. 이 무렵 서북 출신 기독교인 안창호를 만나 민족현실에 눈뜨게 된다. 하와이에서 교회 활동을 하던 그는 안창호가 주도한 독립운동단체 공립협회 활동을 위해 미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간다. 이재명에게 동향 출신 안창호는 스승 이상이었다.이재명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이준 열사마저 순국하자 샌프란시스코 재미동포 공동회의 석상에서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매국적(賣國敵) 숙청을 결의한다. 그리고 그해 도쿄를 거쳐 귀국해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돌며 동지를 규합한다.

무릇 이재명 의사는 기독교 토양 위에서 자란 약관의 청년이었다. 외세와 친일 권력에 의해 처형된 순교자이다.

1910년 9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명 열사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앞서 그가 사형 판결을 받은 날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일곱 번의 큰 죄를 저지른 이완용이 회개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또 큰 죄를 짓자 부득이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죽어 수십만의 이재명으로 부활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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